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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거풍(擧風)과 세심(洗心)

최종수정 2018.09.11 11:50 기사입력 2018.09.1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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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거풍(擧風)과 세심(洗心)
백로(白露) 지나니 하늘이 드높다. 제주의 9월은 또 다른 농번기다. 농부들은 가뭄과 폭염, 태풍까지 삼중고를 견뎌낸 작물들을 돌보느라 새벽부터 마음이 바쁘다. 귤농사로 따져도 병충해에 상한 것, 겉이 터져버린 것, 씨알 작은 것들을 솎아주느라 바쁜 시기가 또한 9월이다. 제주 동부지역의 경우는 이맘때가 월동무 파종 시기라 더더욱 엉덩이 붙일 겨를이 없다.

소농에다 '놀멍쉬멍'에 이골이 난 나로선 농사일보단 거풍(擧風)에 마음이 간다. 이맘때부터 상강절(올해는 10월23일)에 이르는 40여일간은 가을 태풍만 없다면 볕 좋고 삽상한 바람 덕에 제주에서도 거풍을 행할 수 있는 황금기다.

쇄서폭의(?書曝衣). 곧 습기 찬 옷과 서적을 볕에 내다 말려 소독도 겸하는 일은 칠월 칠석(올해는 8월17일) 즈음에 하는 것이 맞다. 농가월령가 칠월조에 '장마를 겪었으니 집안을 돌아보아 곡식도 거풍하고 의복도 폭쇄하소'라고 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태풍 서너 개를 감당하고 나서야 여름나기가 끝나는 제주의 형편으로서는 9월이 적기인 것이다.

장서라 해봐야 소장가치로 따지면 말 꺼내기도 부끄러운 잡서들이 대부분이다. 국문학 전공서, 시집 등등 다 그러모아야 고작 2000여권 남짓이지만 책주인이 워낙 게으르고 손이 느려 벌써 며칠째 꺼내 털고, 말리고, 닦고 있다. 그러면서 올해는 기특한 생각을 하나 해낸 것이 '골라내 버리기'다. 거창하게 말해 거풍을 겸하여 책 욕심을 덜어내고 마음자리도 되돌아보는 세심(洗心)의 기회까지 노린 셈이다.

내 주소에 적을 둔 지 보통 10년은 넘은 서적들이라 정 떼기가 쉽지 않아 기준을 정했다. 이른바 내가 정한 '스크랩 가치의 눈금'들이다. 먼저 문학 서적들을 앞줄에 놓고 저자의 고심과 편집자의 노고가 한눈에 보이는 교양서를 두 번째로 대접한다. 신변잡기류의 에세이, 자기계발서, 월간지 등은 과감하게 내쳤다. 그래저래 한 500여권을 털어내니 서가가 날씬해지고 마음이 가뿐하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10년 전 '스크랩 가치'가 뛰어나다고 판단했던 책들이 사실은 한 번도 뒤적여보지 않은 종이덩어리였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반면 양서인데도 주인의 눈이 어두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것이 적지 않다. 독서가인 척했으나 결국은 수집가에 불과했던 민낯이 드러난 셈이다. 꿀벌이 죽도록 꿀을 모으듯 책을 모았으나 정작 그 책 가운데서 나비처럼 노닐지 못했다는 자책이 밀려든다. 이번 거풍을 계기로 꿀벌형에서 나비형으로 사유와 실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보자고 다짐해본다.
일찍이 이어령 선생이 '젊음의 탄생'에서 무엇이든 틀을 정해놓고 곧이곧대로 파고드는 것을 '꿀벌형'이라고 했다. 전 시대, 또는 잔존하는 우리의 경제생산, 생활양식이 대개 이랬다. '나비형'은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한 리듬 안에서 공존한다. 또한 나비는 직선으로 나는 꿀벌과 달리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며 끝없이 자신의 위치를 변화하고 시야를 넓힌다. 적합한 노동과 적절한 휴식이 기본권이고 창의와 협력을 우선시하는 21세기 지식산업사회에서 나비형은 당연한 선택지다.

요즘 지난 정권이 내세웠던 '소비주도성장'과 이번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정책의 향방과 성과와 관련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까지 오르락내리락한다.

실물경제와 외교안보의 현안을 둘러싼 이견과 논쟁이 국론 분열로까지 점화될까 우려되는 이 시기에 꿀벌형과 나비형을 거론하는 것이 하릴없어 보이지만, 요즘 민심의 향방과 정책이 가리키는 최종점으로 가는 동력은 나비형의 행동양식과 이를 통해 응결되는 집단지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출범 당시 검증방식으로선 가장 좋은 정책, 식견으로 평가받고 스크랩되었을지라도 정권교체 후 1년4개월이 지난 시점인 만큼, 모쪼록 거풍과 세심의 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일이다.

정희성 시인·제주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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