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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8]팜플로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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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던 승용차가 멈춰 섭니다. 여든 남짓 운전자가 내립니다. 할 말이 있는 듯하네요. 기다리라는군요. 뒤 트렁크에서 무언가 꺼냅니다. 순례자의 나무 지팡이를 건네줍니다. 스틱 없이 걷고 있는 우리를 눈여겨본 모양입니다. '산티아고까지 가려면 필요할 겁니다.' 그의 깊고 푸른 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팜플로나에 온 걸 환영해요.'

인류의 늙으신 아버지 같습니다. 어버이 친(親). 나무 위에 올라서서 저 멀리 자식 오는 걸 살피는 마음. 한자 뜻풀이가 이처럼 딱 들어맞는 경험 처음 해봅니다. 팜플로나의 아버지는 전 세계에서 오는 자손들 위해 나무 지팡이를 자동차 트렁크에 잔뜩 넣어가지고 다닙니다. 어느 자녀가 스틱이 없는지 운전하면서 찬찬히 살핍니다. 그는 별 켜진 밤 자기 집 마당 나무들에게 이렇게 속삭이지 않을까요? '나무야, 네 팔 좀 나누어다오. 너도 순례자의 지팡이가 되면 피노키오처럼 목숨 새로 붙을 거야. 길 떠나는 나무가 되어 누군가의 다리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그게 부활이야. 새로운 삶이란다.'
팜플로나는 성벽 안 옛 도심이 특히 아름답지요. 1571년 펠리페 2세 때 지은 웅장한 성채는 보존 상태가 좋습니다. 건물들, 골목들, 새로운 듯 묵었습니다. 오래됐는데 새것 같은 느낌. 새것인데도 오래된 느낌. '오래새로'라 불러봅니다. 과거를 새것처럼 되살려 과거와 현재를 함께 가지기. 그런 느낌 주는 사람, 그런 예술, 그런 사물이 있습니다. 그대가 지금 바라보는 하늘의 구름도 오래새로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오래새로죠. 물리적 시간 인식을 초월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 느낌입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카스틸로 광장으로 나갑니다. 광장은 널찍하고 사람들은 평화롭죠. 한쪽에서 춤을 춥니다. 음악에 맞춰 짝 찾아 2인조로 추는 춤입니다. 친구끼리, 연인끼리, 모르는 사람끼리도 춤을 춥니다. 구경꾼들은 예기치 않은 커플, 이색적인 커플에 환호와 박수를 보냅니다. 아홉 살쯤 보이는 춤소년에게는 여인 신청자들이 줄을 잇습니다. 소년보다 여인들이 더 즐겁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는 걸 소년도 여인들도 알지 못합니다.

반대쪽은 '이루냐' 카페네요. 헤밍웨이가 이 도시에 오래 머물면서 즐겨 찾았다는 카페. 회랑 밖 야외 테이블에 앉아 28살 젊은 내 친구 우진이와 맥주 한 잔 마십니다. 광장 위의 하늘은 전체가 커다란 모자. 석양빛이 푸른 모자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모자 안쪽에 별들이 하나 둘 돋아납니다. 검불그레한 하늘 밭에 돋아나는 빛의 새싹들. 알고 보면 어제 진 별 돌아오는 거네요. 오래새로입니다. 오늘 새삼스럽게 별을 발견하면 더 새로운 느낌이 드는 법. 모자 안쪽에 있으므로 손을 뻗어 새로운 별을 딸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맥주 에스트렐라(Estrella), 즉 별입니다. 하늘의 별을 따서 먹었는지, 은하수 푸른 물 마셨는지 뱃속이 다 시원 상쾌합니다.
"황소들은 육중한 몸집에 옆구리에는 진흙을 묻힌 채 뿔을 흔들고 뛰어왔는데, 그중 한 마리가 쏜살처럼 앞으로 뛰어 나가더니 달려가는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의 등을 들이받아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뿔에 찔린 사람은 두 팔이 축 늘어지고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소는 그 사람을 들어 올렸다가 내동댕이쳤다."

헤밍웨이가 '해는 다시 떠오른다(1926)'에서 이곳 골목의 성 페르민 축제를 묘사한 대목입니다. 페르민은 팜플로나의 수호성인. 축제는 그를 기리는 종교행사인데 정작 광란의 소몰이가 훨씬 더 유명합니다. 헤밍웨이 소설 덕분에 세계적인 관광 상품이 된 거죠. 800m의 좁은 골목길을 황소 떼들이 몰려다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곡예하듯 아슬아슬 내달립니다. 지금도 매년 7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리지요. 매일 아침 8시에 소 여섯 마리를 좁은 골목길에 풀어놓습니다. 위아래 흰 옷에 빨간 스카프 두른 건장한 남자들이 소들을 투우장으로 몰아넣기 위해 소떼들 앞에서 전력질주 합니다. 그 과정에 소설에서처럼 부상자와 사망자가 생기기도 하는 거죠. 모험과 열정의 나라 스페인. 강건한 남성미를 추구한 헤밍웨이의 문학적 고향답습니다.

팜플로나의 밤 골목은 색다른 멋으로 활기찹니다. 골목골목 튤립 피듯 서서 흔들리는 사람들. 화려한 장신들이 멀쑥하니 서서 술파티를 합니다. 앉을 자리도 없는 대만원입니다. 하몽 상점 앞. 칼로 얇게 썰어주는 종업원 모습에 넋이 나갑니다. 하몽은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자연 건조시킨 스페인 특유의 식재료. 짭짤하고 쫄깃해서 샌드위치에 넣어 먹거나 맥주 안주로 그만이죠. 하몽 한 접시 사 들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물 맑은 강릉 봄 바다에 배 밀려 나가듯 두리둥실 나아갑니다. 바닥에 앉아 금요일 밤을 즐기는 자유분방한 유럽 청춘들. 저도 그만 조개 무늬 돌바닥에 퍼질러 앉습니다. 나그네에게도 때론 닻이 필요할 때가 있지 않겠는지요. 보름달이 사람의 바다를 환히 비춥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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