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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7]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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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14일, 태양계의 무인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해왕성 외곽을 지나다가 찍은 지구 사진을 보면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창백한 푸른 점'. 우주 차원에서 보면 지구별은 한 티끌에 불과하단 거죠. 그 티끌 속에서 마음끌탕하다 가는 게 우리들 인생입니다. 쩔쩔매며 살아가는 번뇌와 망상. 이 역시 티끌 속 더 작은 티끌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문제들일 뿐. 성층권에만 올라도 사람은 티끌보다 작아 보이지 않습니다. 박테리아들이 아무리 많아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길 위를 걷는 이들 많지만 길이 멀면 존재감이 점차 없어집니다. 순례길을 걸으면 없어지는 존재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기회가 생기지요. 동행하는 이들 하나둘 사라지는 가운데 나와 대자연이 고독하게 마주하는 경험을 합니다. 창백한 푸른 점이 되어, 점점 더 작은 점이 되어, 마침내 자기를 무화시키는 거죠. 무화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된다는 뜻입니다.
행인의 본질은 고독입니다. 길을 걸으며 티끌의 고독을 느껴야 하지요. 고독한 행인이, 가슴 절절하게 고독해본 티끌만이, 다른 티끌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창백한 티끌이 다른 티끌을 사랑하는 이치와 같은 거죠. 사랑하는 티끌이 모이는 데가 '사람의 마을'입니다. 그런 마을다운 마을을 보았습니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 산맥 속으로 들어가 처음 당도하는 곳. 카미노 프란세스의 첫 도착지인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입니다. 론세스바예스는 지명인 동시에 수도원 이름이기도 하죠.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의 숙소를 가리킵니다.

순례길 구간 중 가장 험하기 때문에 도착하는 이들은 특별한 감회를 가집니다. 생장에서 일곱 시간. 더딘 사람은 열두 시간 걸리기도 하죠. 기진맥진 도착해서는 첫 구간을 넘었으니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자신감을 부풀립니다. 그러나 한두 주 지나면 사람들은 줄기 시작합니다. 동행하는 가족과 친구도 말수가 적어지죠. 순례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와의 약속 때문에 촉발되고, 실제로 나의 현존 앞에 펼쳐지는 길입니다. 사정이 생겨 못 가면 다음에 그 지점부터 다시 가면 됩니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습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따뜻한 미소와 친절로 대해주는 분들을 봅니다. 순례자 여권을 받아 서류에 기록하고 룸과 매트를 배정해주며 실제로 안내를 해주는 이들. 대부분 자원봉사자입니다. 노인들도 꽤 있습니다. 순례길을 여러 번 돌고 이제 은퇴해서 후배 순례자들을 돕는다는군요. 사랑과 평화, 존경과 감사가 온몸에 육화돼 수도원 전체를 은은한 향내로 덮는 분들입니다.
피레네 산맥 속의 스페인 국경마을.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험한 산골 속의 이 수도원은 세계 각지의 순례자들로 사람의 마을을 이룹니다. 모두가 차분히 줄서서 기다리고 서로를 격려하기도 하지요. '잘해 보세요. 성공하기를 바랍니다'는 말보다는 '오늘 당신 안의 신성을 찾으세요'라는 속삭임이 내면에서 들립니다. 봉사자들 마음속에 성모와 예수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성모나 예수는 조각이나 그림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마을에, 사람들 가까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아 동행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진정한 고독에 이른 이가 생기면 그들의 몸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게 아닐까요? 하나가 된다는 건 뭘까요? 온화! 느낌과 생각과 표정과 체온 전체가 따뜻해지는 거죠. 마음의 망상과 몸 안의 병균들마저 덤으로 날아갑니다. 장수와 행복의 비결. 영성체험과 득도. 다 온화입니다. 체온이 올라가고 마음이 붉어져야 하지요. 저는 천국의 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따뜻한 몸과 마음이 곧 거기에 이르는 문입니다.

사람의 마을에 가면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일상의 자기를 벗어나 한 번쯤 고독과 마주한 이들. 더 크고 높은 차원에 올라 스스로가 티끌임을 절절하게 깨달은 이들. 일상과 신성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 이들은 절대로 갑의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 욕심 부리지도 않습니다. 오늘 이 순간,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즐거움 삼고 자기의 빛나는 고독 속으로 다른 티끌을 초대합니다.

인생 목표가 근사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작지만 쉬운 답을 찾았습니다.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한다(自利利他)'는 말보다 실감납니다. 자기 몸과 마음 따뜻하게 하기. 가까운 이웃 마음 다해 손잡아주기. 무얼 먼저 하든 괜찮습니다. 따뜻하면 됩니다. 나부터 따뜻해도 좋지만 상대를 따뜻하게 대해주면 나도 따뜻하게 됩니다. 그러면 창백한 푸른 점이 점점 어두워져 아주 꺼지는 일은 없을 테지요. 비록 '햇빛 속에 떠도는 작은 먼지 천체'지만 여전히 빛나는 별일 테지요. 옛 시조에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했는데, 이웃에게 다정한 건 병이 되지 않습니다. 다정하세요. 다정합시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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