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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6] 피레네 산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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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이육사 시인의 '광야'에 나오는 이 구절 좋아합니다. 기상도 씩씩하지만 산을 생명체처럼 그려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 산 저 산 다녀보면 '산은 오르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다'는 말 실감합니다. 수천만 살도 더 되는 엄마. 인간 생명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땅에서 가장 큰 짐승. 누워 잠든, 그러나 매순간 살아 숨 쉬는 목숨. 이런 걸 느낍니다.

산은 오르고 넘는 대상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 느낌 나누어 가지는 어머니 선조입니다. 등산(登山)보다는 유산(遊山)이 윗길인 거죠. '그 놓임새는 위치를 말함이요, 앉음새는 산의 모양을, 품새는 산의 도량을 말한다'고 제 산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앉음새만으로도 가슴 불끈거리는데 품새를 가늠하는 일은 산에 드는 이의 도량과 비례합니다. 두려움에 겁먹고 머뭇거리는 이는 소인이고 산의 품새에서 넉넉함을 느끼는 이는 곧 대인인 겁니다.
또한 산은 신선과 속인을 나누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산 아래 계곡에서 놀면 속(俗)이고 산에 들면 선(仙) 아니겠습니까. 어찌 그 위치와 형용만으로 판단하겠습니까? 하 많은 생명과 시간을 품고 있는 능력, 즉 도량을 느끼고 배우고 스스로에게도 견줄 수 있을 때, 그이가 곧 산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기는 생장피에드포르(St Jean Pied de Port). 산티아고 가는 '프랑스 길'의 시작점입니다. 이곳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지만 여기는 벌써 피레네의 품안이죠. 오늘 아침 순례자 사무실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순례자 여권(Credencial)을 발급받고 순례의 상징인 조개껍데기도 얻어서 배낭에 매답니다. 값이 없는 대신 기부제입니다. 산맥을 넘는 안내 루트가 필요하다 했더니 자원봉사 직원은 싱글벙글 웃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고는 잠시 뒤 한국어 안내문을 건네줍니다. 프랑스 깊은 산골에서 만나는 한글. 눈에 번쩍 불 켜집니다. 설명은 쉬운 영어로 합니다.

두 가지 길이 있다.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나폴레옹 루트.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간다. 출발지와 고도 차이가 크게 난다. 많이 힘들다. 전망은 좋다. 발카로스를 통과하는 우회 루트도 있다.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간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린다. 안전하다. 당신 체력에 맞게 선택하라.
아내는 안전을 택합니다. 10㎏ 배낭을 메고 가파른 산길 가기가 겁나는 모양입니다. 영어로 당나귀를 뜻하는 동키(donkey)는 배낭 배달 서비스에도 이용되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다음 숙소까지 차로 짐을 배달해주는 거죠. 나그네는 간편한 차림으로 가면 되는 겁니다. 몸 성한데 그럴 순 없죠. 산에 드는 사람이 그럴 순 없지 않겠습니까.
프랑스 남서쪽 끝퉁이 도시 바욘에서 생장까지 기차표를 예매했는데 기차 대신 버스가 왔습니다. 어제 저녁에요. 동승자 중 어떤 프랑스 여인은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길을 전 세계에 홍보한 작품일 테죠. '연금술사(1988)'와 함께 현대인들에게 여행의 의미를 새기게 하는 작품입니다. 코엘료는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만족스러운 급여와 심리적 안정을 버리고 어느 날 산티아고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는 어릴 적 꿈이었던 작가의 길을 결심합니다. 돌아와서 쓴 작품. 70여개 언어로 번역되고 1억 권 이상 팔린 이 작품. 세계인들에게 '나도 걸어보고 싶다'는 돌풍을 일으킨 '순례자(1987)'입니다.

생장에 도착하니 해가 기울고 있습니다. 숙소를 정하고 산책을 합니다. 사암 벽돌 건물들이 옹기종기 들어차 있고 건물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깔끔하고 단정합니다. 좁다란 골목엔 검은 돌길이 반질거립니다. 순례자 사무실 근처의 '야고보 문'에서 성당이 있는 생장 다리까지 두어 번 걸어봅니다. 내일이면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하지만 지금은 배회를 벗하는 시간. 하릴없이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는 자유도 즐깁니다. 가리비 무늬가 새겨진 감청색 륙색 하나를 기념으로 삽니다. 산티아고까지 걸어가며 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와 해야 할 세 가지를 스스로 다짐해 봅니다. 생각하지 마라. 걷고, 먹고, 자라.

저녁의 니베(Nive) 강은 황홀하게 예쁩니다. 피레네 산맥의 품속에 들어앉아 오밀조밀 굽돌아 흘러갑니다. 산맥이 낳은 자녀일 테죠. 새색시처럼 수줍기도 하고 암팡지게 떨어져 폭포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 품에 들은 이들 순순합니다. 국적은 달라도 상냥하게 인사 나누죠. 남녀노소 누구나 선인(善人)이고 선인(仙人)입니다. '세계 신선 연합' 꾸릴 만 하네요. 니베 강 다리에 푸른 조명 들어오고, 푸른 조명보다 더 푸른 하늘엔 눈썹 같은 초승달이 떠 있습니다. 지상과 천상이 은은하게 서로 비춥니다. 하늘에 강물에 두루 흘러가는 피레네 산맥의 푸른 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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