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윤재웅의 행인일기 4]중세 마을 콩크에서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콩크(Conques)는 프랑스 산골마을입니다.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5위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봄꽃 흐드러지게 피면 황홀하고 여름철은 선선합니다. 멀리서 보면 산악 지형 급경사에 아슬아슬 붙어 있는 듯한데 막상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평온한 느낌이 듭니다. 여기 사람들은 중세 시대 세워진 건물 그대로를 보존하면서 살아갑니다. 21세기 나그네가 9세기 마을을 걸어 다니는 느낌을 아시겠는지요.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특별한 방식입니다.

부유한 부부가 시골 농원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아름다운 딸이 있었죠. 딸은 점심 뒤의 휴식 시간에 부부가 쉬고 있는 정자로 우편물을 가져오곤 했습니다. 기르던 개가 늘 뒤따라왔지요. 어느 날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젠 아무도 우편물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우편물을 들고 올 시간이 되면 개만이 정자 앞으로 나아가 딸이 걸어오는 공간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녔죠. 살아 있는 딸 반기듯 말입니다. 이 개가 그 시각에 펄쩍거리는 이유를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딸에 대한 사랑이 깊은 부부만이 이 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개는 아마도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는 능력을 가졌나 봅니다. 콩크 마을을 거닐며 저는 왜 개 이야기가 떠오르는 걸까요. 현존은 '지금'만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현존 속에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도 들러붙어 있고, 미래에 다가올 사건의 씨앗도 웅크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모두 그렇습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삼세(三世)가 함께 있지요. 콩크 마을 사람들은 중세의 유산 속에서 현재를 살며, 현재와 미래의 동시공존을 예약합니다. 시간의 지평선은 여기에서 무너집니다. 둥글게 말려 몸 안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열두 살 소녀 성녀 푸아(Sainte Foy)를 가슴으로 맞이합니다.

그녀는 마을 한복판에 있는 성당 이름 속에서 영원을 삽니다. 생트 푸아 성당. 303년에 열두 살 나이로 죽은 한 귀족 소녀의 유골이 안치된 곳입니다. 그녀는 부모 몰래 기독교인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다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그녀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산골짜기 아쟁(Agen). 콩크에서 200㎞ 떨어져 있는 곳. 그녀가 죽은 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기독교가 공인(313)되고 나서도 한 세기가 더 지난 5세기. 성인으로 추증된 그녀의 유골을 처음으로 모신 곳이 바로 아쟁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400년쯤 지나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8세기 말엽 다동(Dadon) 수도사는 콩크의 첩첩산골에 은거하면서 작은 베네딕트 수도원을 만들죠. 866년엔 수도사 아리비스퀴스(Ariviscus)가 푸아의 유골을 아쟁에서 훔쳐 와 여기 수도원에 안장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공간에 와서 기도하고 병이 치유되는 사례가 늘자 순례자들이 모여들면서 마을이 형성됩니다. 오늘날의 콩크입니다.
생트 푸아 성당과 콩크 마을은 성인 마케팅으로 성공한 경우지만 지리산 쌍계사 육조정상탑은 마을이 흥성거릴 정도는 아닙니다. 신라 성덕왕 때였죠. 삼법 스님은 중국의 육조 혜능 스님의 도와 덕을 숭모하여 혜능 스님이 입적하자 머리 유골을 훔쳐 와서 쌍계사 아래 길지에 비밀리에 안장합니다. 후대에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이 탑이 육조정상탑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시비곡직을 떠나 간절한 마음의 떨림이 전해옵니다. 혜능 스님이 계시던 중국 조계산은 한국 불교 조계종의 고향 아닌가요. 정통성이 간절했던 겁니다. 중국 광둥성 남화선사를 방문했을 때 혜능 스님의 좌탈입망 미라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님의 정상(두개골)은 온전히 잘 있었습니다. 제가 육조정상탑을 전설이라고 보는 이유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성녀 유골의 이송을 '은밀한 이동(transfert furtif)' 혹은 '신성한 도둑질(pieux larcin)'이라고 합니다. 말이 예쁩니다. 도둑질이긴 한데 신성하다! 천 년 이상 수많은 순례자가 여기를 찾아와 참배하고 다시 산티아고를 향해 길을 떠나곤 했습니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습니다. 마음이 평안합니다. 앞치마에 빵을 몰래 감추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다 참수형당한 소녀 이야기가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신을 향한 송가를 합창합니다. 어지간한 마음의 병도 어찌 낫지 않겠습니까.

생트 푸아 성당의 성립은 '지금 여기'를 신성한 장소로 바꾸고 싶은 민중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험한 산골 지형, 휴양지의 서늘한 기온, 수행처의 고적감, 성지로 가는 중간 경유지, 애처롭고 극적인 순교 이야기와 그 증거, 누적된 시간과 성스러움의 정통성, 이 모든 요소의 결합이 신성한 장소 탄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종교에도 고도의 마케팅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우리나라 사찰들을 여기저기서 많이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삼세가 다 마음이고, 간절한 마음이 진신사리보다 빛납니다.

문학평론가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하이브 막내딸’ 아일릿, K팝 최초 데뷔곡 빌보드 핫 100 진입

    #국내이슈

  •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세상에 없는' 미모 뽑는다…세계 최초로 열리는 AI 미인대회

    #해외이슈

  •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 황사 극심, 뿌연 도심

    #포토PICK

  • 매끈한 뒷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게걸음 주행하고 제자리 도는 車, 국내 첫선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 용어]'법사위원장'이 뭐길래…여야 쟁탈전 개막 [뉴스속 용어]韓 출산율 쇼크 부른 ‘차일드 페널티’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