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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영혼 말살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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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 15년쯤 전, 한 법원의 살인 사건 재판이었다. 대개 그렇듯 잔인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채업자를 찾아가 기절시킨 후 비닐 랩으로 얼굴을 감아 질식사시켰다. 돈 때문이었고 범인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건장한 체구에 범죄의 그림자가 어울릴법한 인상이었다. 그는 재판 내내 비교적 담담하고 목소리에 떨림이 적었다.

다른 한 명은 대조적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물렁한 살집이 붙었다. 평범한, 어찌보면 좀 순해보이는 인상이다. 그는 재판 내내 거의 울다시피했다. 다른 공범이 시키는대로, 억지로 따랐을 뿐이라는 울먹임이었다. 그런 진술을 바라보는 다른 공범의 눈은 살기가 보일 정도로 준열했다. "같이 해놓고 왜 발뺌이냐"는 것이었다.

결국 건장한 체구의 사내는 중형, 다른 공범은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았다. 재판 직후 판사를 만났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팔에 이렇게 거뭇거뭇한게 자꾸 생기네" 검버섯 비슷한 걸 가리키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씁쓸한 것은 검버섯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이런 사건 말이야, 어떻게 확신을 하겠어. 진술만으로 판단을 해야 하거든. 쉽지가 않아." 주범과 종범을 가른 판결은 당사자들에게 인생이 걸린 문제였다. 판사는 신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짓는 이가 있을지도.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사형제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게 했다.
그 때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뇌가 아니라 탐욕에 의한 협잡 의혹이다. 기자가 특종 하나로 명명한 이름을 남기듯이, 법조인들도 자신만의 큰 치적을 쌓길 바란다고 한다. 상고법원이라는 숙원을 풀어준 대법관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었을까.

그 의혹 중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이 있다. 고등법원에서 내린 '해고 무효' 판결을 대법원이 뒤집었다. 회계가 핵심이었다. 쉽게 말해 향후 생산설비(유형자산)에서 예상되는 매출이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해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회계에 반영했다. 기존 차종을 단종시키고 후속 신차는 개발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아예 회사를 접겠다는 의미라서 앞뒤가 맞지 않다. 감사조서(감사보고서의 기초 자료)와 감사보고서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았고, 감사조서에는 작성한 회계사의 서명조차 없었다. 하급심의 법 적용이 온당한 지만을 따지는 대법원이 '사실'을 뒤집었다.

그리고 지난 6월,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 서른번째 희생자가 발생했다. "해고는 죽음"이라는 절규는 현실이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인간을 위해 만든 법, 그 법을 집행하는 판사가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 셈이 된다. 상고법원 수백개를 만든다고 해서 한 사람의 영혼과 비할 바 아니다. 한 영혼은 하나의 세계다.
'최후의 보루'는 없다는 막막함이 엄습한다. 돈 없고 빽 없으면 사막에서 어느 바람에 휩쓸려갈 지 모른다.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받침대가 흔들렸다는 점에서 국정농단 못지 않다. 민주공화국의 표피 아래 얼마나 썩어 문드러져 있었던걸까. 길고 잔혹한 여름이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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