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도시 한복판에서 바다를 보고 있습니다. 서초동 어느 제약회사 사옥 앞입니다. 이 건물 일층 정면에 설치된 대형수족관에서 그런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바짝 들여다보면 꿈속 같고, 조금 떨어져 보면 동영상으로 보는 자연도감 같습니다. 일종의 자연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좋습니다.
“삭막한 도심에 소박한 행복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기업의 작은 나눔으로 시민들이 마음의 휴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쁜 발걸음을 멈추고 잠깐이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장소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분 뜻대로, 제 발길은 여기서 자주 멈춰집니다. 어쩌면 이제, 물고기들이 먼저 저를 알아볼지도 모릅니다.
좋은 이웃을 두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입니다. 자신이 아끼는 것까지 흔쾌히 내어주는 사람 곁에 산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혼자만 쓰고 보고 즐기고 싶은 욕심을 누르기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이 수족관만 해도 그렇습니다. 중역회의실 근처나 로비 안쪽 깊숙이 설치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고기들도 늘 보는 얼굴이 지루하고 권태로워서, 다가서는 눈길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골목길 담장 위의 줄장미들이 싱그럽고 어여쁜 것은, 그것들이 아무런 대가(代價)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예외 없이, ‘인간의 화폐로 셈할 수 없는(priceless)’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광화문 어느 빌딩 ‘글판(板)’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거기 적힌 한 줄에 삿된 속셈이 들어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가 광장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존경의 시선으로 우러르는 것 또한, 그분들이 한량없는 사랑의 눈길로만 우리를 굽어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때 세 들어 쓰던 조그만 사무실 생각이 납니다.
옆집은 저택이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괜히 미안했습니다. 풀 한번 뽑지 않고, 물 한번 주지 않고서 사계절 눈부신 풍광을 즐긴다는 것이 죄스럽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언제나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행인들에게도 똑같은 인사를 건네곤 했습니다.
그이가 마당의 꽃과 나무를 정성들여 가꾸는 뜻이, 혼자 보고 즐기려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어느 대기업 회장의 얼굴이 포개집니다. 평생 애지중지 가꾼 숲을 만인의 쉼터로 내어주고, 자신도 나무 밑에 묻혔다지요. 혼자 가지면 마당이지만, 나누는 순간 광장이 됩니다.
대학원에서 박물관 마케팅을 공부하는 제자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좋은 전공을 택했다. 박물관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소장품을 언제 어떤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나눠볼 것인가를 생각하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세상과 관계를 늘려가지 못할 때 박물관은 유물 창고나 무덤이 되고 만다.”
잔소리가 제법 길었던 날입니다. “수장고(收藏庫)에서 잠든 물건은 땅속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최대한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 값진 보물일수록 번식력이 좋다. 관람객의 숫자만큼 늘어간다. 백만 달러짜리 유물을 천명에게 보이면, 천명의 소장자가 생긴다. 천명의 백만장자가 탄생한다.”
저는, 이 수족관 물고기들의 친구이며 이웃입니다. 아니, 이 거리의 모든 이들이 그럴 것입니다. 흐뭇한 장면이 연달아 떠오릅니다. 이른 새벽 미화원 아저씨가 간밤의 안부를 물으며 손을 흔듭니다. “어이 친구들 잘 잤는가?”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유리에 이마를 붙이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친구야! 이리 가까이 좀 와봐.”
이렇게 좋은 벗과 이웃들을 소개해준 회사 이름을 누가 잊겠습니까. 간판을 올려다보면서 고마워할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이 물고기들의 집을 이야기하며 칭송할 것입니다. 물고기들이 영업사원이 되어서, 방방곡곡을 떠다니는 모습까지 눈에 선합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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