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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생각하며] 등불을 들고 비오는 종로 밤거리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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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를 검색했다. 몇일 전에는 구름 표시가 나오더니 이제 아예 우산그림이 뜬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터이니 조계사 주변 종로지역의 일기예보를 다시 살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비가 내리겠다고 두 시간 단위로 우산그림이 연이어 빼곡이 그려져 있다. 요즘 일기예보는 왜 그렇게 잘맞는지 모르겠다. 틀려서 문제가 된다면 당연히 기상청이 욕을 얻어먹을 일이다. 하지만 예보가 정확해도 “왜 이렇게 정확한거야! 틀리면 좋을텐데.”하며 화를 낸다. 잘 맞는 것도 때로는 원망스러운 날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그래도 비가 국지적으로 내릴 수도 있고 또 한반도는 넓으니까(?)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거두지 않고 행사시간까지 기다렸다.

습관처럼 숙소 창밖을 수시로 보고 또 본다. 이웃빌딩의 불빛 때문에 밤에는 장막커턴을 치고 차소리와 매연 때문에 창문은 늘 닫아놓고 지낸다. 아침에 비를 확인하기 위해 커튼을 밀쳤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창문에는 빗물자국이 선명하다. 길거리에 달아놓은 연등 아래에서 사람들이 우산을 쓴 채 신호등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 전부 우산을 펴고 있는걸 보니 비의 양이 많은 모양이다. 적게 내릴 때는 우산을 접고서 걷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이는 경험치에 의거한 결론이다. 우산을 펴지않는 사람의 숫자를 보고 숙소 창문을 통해 비의 양을 헤아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볼 때 마다 야속하게도 비는 꾸준히 차분하게 변함없이 오래토록 내린다. 실내생활 위주로 하는 현대인에게 날씨가 예전만큼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시가지를 행진하는 행사로 인하여 산이나 들로 나갈 때처럼 계속 바깥날씨를 살피게 된다. 비가 와서 좋은 날도 있지만 비 때문에 불편한 날도 많다. 좋은 날에만 오고 불편한 날은 내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건 땅위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하늘의 구름나라도 나름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길일(吉日)이 따로 없다. 야외행사는 맑은 날이 제일 좋은 날이다. 만인천작(萬人天作)이라고 했다. 일만 명의 생각이 모이면 하늘상태도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제갈공명의 날씨를 바꾸는 솜씨를 빌려오는 방법도 있겠다. 그런데 빌려줄 것 같지 않다. 어쨋거나 수십만년동안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법칙을 인간이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다. 반가운 손님이 오면 비가 온다고 하는 속담처럼 성인께서 오셨으니 꽃비가 화려하게 내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역시 남을 바꾸는 것보다 나를 바꾸는게 훨씬 쉽다. 농민의 모내기에 도움이 될 것이고 산불을 예방해 줄 것이며 물오른 가로수 잎을 촉촉하게 적셔줄 것이며 요즈음 도시인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인 미세먼지까지 깨끗하게 씻어줄 것이다.

지난 주말(5월12일)은 종로거리를 형형색색 깃발과 코끼리 용 봉황 등 여러 가지 장엄물과 갖가지 디자인의 연등으로 밤거리를 장식하는 ‘연등회(燃燈會)’ 축일이다. 땟깔나게 보여주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했다. 그런데 연등 위에 비닐을 덮어야 하고 우산을 씌워야 하고 또 비옷을 입어야 하니 이런 대략난감한 일이 어디 있으랴. 야외에 노출된 대규모 장엄물은 기름먹인 한지로 제작했지만 소규모 연등의 재료인 일반한지는 대부분 물에 약하다. 물에서 나온 것이기에 물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혹여 자기모양을 유지하는 것 조차 포기할지도 모른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니 별별 생각이 다 일어난다. 할머니 세대처럼 “우리의 정성이 부족했나 보다.”하며 늘 그렇게 위로했던 것처럼 또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일천년 역사의 연등회가 어찌 해마다 쾌청한 날만 있었겠는가? 그래도 꿋꿋하게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며 오늘도 그 역사를 이어갈 뿐이다.

동국대학교 운동장에는 작년과 비슷한 규모의 인파가 모였다. 우산과 비옷 때문에 1인당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지다보니 참여인원이 오히려 시각적으로는 더 많아보인다. 하지만 종로거리의 관광객 숫자는 날씨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도 열정을 가진 적지않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외국인 관광객의 환호는 여전하다. 창넓은 커피숍 유리창 안으로 빼곡하게 앉아있는 관람객들도 여느 해처럼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켜주었다. 비오는 날 차 안에서는 중앙차선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걸어가니 선명하게 제대로 보인다. 종로거리는 2017년 중앙버스전용차로제를 운영하면서 중앙버스정류소는 이동형을 도입했다. 시민들의 교통편리와 함께 종로 거리축제 기획자를 배려한, 양쪽을 함께 살피는 열린행정 덕분에 연등회도 예년처럼 변함없는 환경에서 치룰 수 있었다. 비는 여전히 착하게 내리고 아스팔트 위에 고인 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연신 물방울을 튕긴다. 종로를 반 쯤 통과할 무렵 비의 양이 현저하게 줄었다. 우산을 들어도 좋고 내려도 좋을 만큼 애매한 비였다. 비옷으로 무장하고 카메라를 비닐로 두른 취재진이 원하는 장면을 위해 모두 우산을 거두고서 한참을 걸었다. 비 때문에 공기 중의 매케함이 사라져 걷기는 훨씬 수월하다. 비 속에서 연등행렬은 무사히 조계사에 도착했다. 하늘을 가린 연등은 땅을 밝히고 두 손에 든 연등은 하늘을 밝힌 날이다.
원철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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