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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천천히 태어나는 삶

최종수정 2018.05.15 11:45 기사입력 2018.05.1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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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학교에 있다 보니 '스승의 날'이 되면 좀 민망해진다. 스승은 자신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내가 스승으로 불릴 자격이 있나 하는 반성에서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의미를 일부러 헤아려본 것은 첫 자리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싶어서다. 스승의 날에 내 은사님조차 제대로 찾아뵙지 못하고 살지만 마음 안에 공부길 이끌어주신 스승이 계시다는 건 큰 행복인데, 스승의 자리에 나를 놓고 보면 아직도 좀 부끄럽고 어색하다.

고백하자면 요즘 나의 스승은 학생들이다. 학생들을 통해 내가 배운다. 학생들에게 내가 내세울 것은 먼저 태어나 공부길을 앞서 걸었다는 것이지 어떤 다른 거창한 진리를 설파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교수님이라는 호칭보다 '먼저 산 사람'이라는 의미의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나이를 앞세워 훈계했다가는 꼰대소리 듣기 딱 좋고 공부를 가르칠 때도 눈높이를 잘 맞춰야 한다. 이러나저러나 고민인 스승의 날, 선생이라는 위치를 생각하며 앞서 사는 사람으로서의 반성을 하는 중이다.

그럴 때 자주 떠올리는 말이 있다.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는 것. 학생들이나 선생인 나나 우리 모두는 아직도 태어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 10대 학생들은 빨리 대학생이 되고 싶어 하고 20대 학생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빨리 취직하고 자리 잡고 싶어요.' 면담에서 아이들이 다급하게 말한다. 그러면 나는 앞서 사는 사람으로서 먼저 경험해 본 바를 짐짓 장난스럽게 들려준다. '서른에 안정될 것 같겠지만, 어쩌지, 서른이 되면 서른의 숙제가 있고 마흔이 되면 마흔의 숙제가 있어서 흔들릴 일이 더 많아요. 마음을 늘 다잡아야 해요. 그러니 인생은 늘 태어나고 있는 중, 그 과정을 즐기세요'라고.

이 말에 아이들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그래도 장밋빛 미래만 이야기하기보다 현실의 자리를 그대로 일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늘 이 작전을 고수한다. 앞서 산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말, 인생은 천천히 태어난다는 것. 산통은 엄마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 아가도 겪는 고통이기에 지금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산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죽는 순간까지 계속 그러리라는 것. 그러니 우리는 천천히 태어나는 삶을 매번 배워간다는 것.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는 내가 좋아하는 김서령 작가의 책 제목이기도 한데 읽어보지 않은 분들께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스무 살 시절에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는 대한민국의 청춘들에게 느리게 태어나는 삶을 보는 건 그 자체로 큰 공부다. 살면서 운명의 배는 엎치락뒤치락 여러 번 뒤집힌다. 그 매번의 파도와 풍랑은 삶이 새로 태어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한시를 즐겨 읽고 붓글씨를 쓰시던 아버지는 지금 아름답고 순한 우리말로 시를 쓰신다. 여든의 아버지가 시인으로 태어나는 걸 보면서 나는 꽃은 봄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다섯 살에도 열 살에도, 스무 살에도 마흔에도, 쉰에도 여든에도 우리 각자는 매일 새로 태어나는 삶을 통과하고 있다. 그제 만난 하늘이, 어제 만난 누군가의 미소가, 나를 분노케 하는 일이, 오늘 읽는 책이, 내게 당도한 어려운 숙제가, 예상치 못한 불운이 모두 나를 천천히 태어나게 돕는 것들이다. 선생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천천히 태어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이 오늘 나를 다잡아 살게 한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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