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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봄날은 간다

최종수정 2018.04.20 08:42 기사입력 2018.04.20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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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문과대학 건물 아래 빨간 우체통. 봄날 햇빛 속으로 벚꽃 하염없이 지고 있으리.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쓴 응모작을 부치고 나면 이내 가슴 두근거리며 문예지에서 걸려올 전화를 기다렸다. 훗날 스승의 추천으로 문단의 말석에 끼어 앉은 내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못난 제자의 마음을 살펴 '당선'이라 했으나 천료(薦了)임을 누가 모르랴.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이여. 모든 기억은 감각의 모든 영역에 불타는 낙인처럼 선명하게 남았다. 그곳은 지는 꽃에 글썽이는 눈에 머무르지 않으며,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봄날 꽃의 향기에 그치지 않는다. 팝콘처럼 흩어지는 여학생들의 웃음 속에,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삽화 속에 머무른다. 그 먼 주소지로 가끔 엽서를 쓴다. 그 중 하나.

…부암동 사무소 앞을 지나면서 일기예보를 들었다. 전국에 내려진 호우주의보가 모두 걷혔다. 그러나 말끔하게 개지는 않았다. 멀리 북한산이며 인왕산이 검게 보이고, 하늘은 회색이다. 조금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바람이 부는 건지, 내 차가 달리는 서슬에 창으로 밀려 들어온 바람인지 모르겠다.

그날은 큰비가 온다는 날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이른 오후 수업을 마치고 '신라'로 갔지. 너와 나는 예술대학 건물을 지나 학생회관 앞 돌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 돌계단은 30년을 훨씬 지난 지금도 그 때의 그 해묵은 빛깔로 자리를 지킨다. 커피를 끼얹은 듯한 그 빛깔. 나의 구겨 신은 가죽신과 너의 붉은색 나이키 운동화가 계단을 내려갔다. 80년대.

아주 센 바람이 갑작스럽게 불어 머리칼과 웃옷을 나부끼게 했다. 꽉 끼는 청바지는 끄떡없었지. 너는 말했다. "이런 날씨 정말 좋아." 하지만 바람 끝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곧 비가 온다는 신호였기 때문에 우리는 걸음을 서둘렀다. 다방 문이 닫혔을 때 사나운 파열음을 내며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때의 신라는 거리 쪽 창문을 그림이 그려진 나무 벽으로 막아 두었다. 나중에 유리창을 트지. 비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없었지만 나의 상상과 추억 속에서 퇴계로는 흥건히 젖었다. 빈 DJ박스에 들어가 음악을 틀었다. '더 롱런(The Long Run)'이라는 이글스의 음반에 든 몇 곡을 들은 다음 네가 말했다. "다 모르는 노래야."

기억은 여기까지다. 다음은 모르겠다. 어쩌면 소주를 마시러 '이층집'에 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길에 고인 물을 밟아 신발코를 적시며 총총히 집으로 돌아갔겠지.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퇴계로의 밤은 어두웠고, 막막한 느낌을 주었다. 어떤 때, 그 길은 낯선 외국의 풍경처럼 떠오른다. 80년대.

부암동 사무소 앞을 지나면서, 순간이지만 바람을 느꼈다. 그 바람이 너를 떠올릴 기회를 주었다. 이 짧은 글로 인하여 추억은 픽서티브를 뿌린 파스텔화처럼 보존되리라. 시간은 빨리 간다. 우리는 지난 연말 모임에서 만났고 추워서 입김을 뿜으며 헤어졌다. 봄날은 간다. "언제 또 보자"고 했지만 쉽지 않은 것이다.

아직도 빨간 운동화를 신고 다니나? 남산코끼리.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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