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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85]외솔기념비 앞에서

최종수정 2018.03.30 09:31 기사입력 2018.03.3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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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시인

윤제림 시인

사사오입(四捨五入). 셈법에서 쓰는 말입니다. '5 미만의 수는 버리고, 그 이상이면 윗자리로 올려 넣는'다는 뜻입니다. 제1공화국 3대국회가 억지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유명해졌지요. 그래서 그런지 어감이나 생김새부터 좀 찜찜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것 대신에 '반올림'이란 말을 쓰게 된 것은 참 다행입니다.

누가 지었을까요. 절하고 싶어집니다. 경쾌하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맑고 예쁜 말을 공짜로 받아서 쓰니까요. 조사해보니, 그런 말들이 한둘 아닙니다. '마름모꼴, 꽃잎, 짝수, 홀수' 같은 용어들이 모두 한 사람의 자식들입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직경(直徑)' 대신 쓰라고 '지름'이란 말도 낳았습니다.

하나같이, 말하고 듣기가 쉽고 편합니다. 입속에 넣고 굴리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명랑한 말들입니다. 아무리 써도 변함이 없을 물건입니다. 사람에 비하면, 오목오목 '잘 생긴' 소녀들입니다. 깎아놓은 밤톨 같은 소년들입니다. 추측컨대, 그이도 그런 소년 소녀들을 생각하면서 환하게 빛나는 말들을 찾아냈을 것입니다.

제 중학생 시절의 기억이 심증(心證)을 더해줍니다. 문법책 이름이 '말본'이었습니다. 명사를 '이름씨'라 했고, 동사를 '움직씨'라 배웠습니다. 형용사를 '그림씨'라 불렀고, 부사를 '어찌씨'로 익혔습니다. 이상한 일은 제 어린 마음에도 그런 말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근사하게 여겨졌습니다.

단어들을 사람처럼 '아무개 씨'로 부른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사전 속에 갇혀있던 말들이 제 앞에 나와 앉는 것 같았습니다. 이름씨는 점잖게 걸어 나오고, 움직씨는 폴짝 튀어나왔습니다. 어찌씨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그림씨는 귀부인처럼 우아한 포즈로 섰습니다. 셈씨, 토씨도 나왔습니다.
아홉 가지 '품사(品詞)'가 생물처럼 살아 움직였습니다. 품에 안기고,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이름을 부르면 대답했습니다. 제 앞에 달려와 서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노래도 하고 그림도 그렸습니다. 어렴풋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책의 지은이는, 우리말과 글이 우리 생명의 일부임을 가르쳐주려 했던 것이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85]외솔기념비 앞에서
어느 방명록에 남긴 그의 '손 글씨'가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킵니다.'한글이 목숨'! 한글은 그에게 생존의 이유이면서, 목표였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화법을 빌리겠습니다. "…장미꽃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G.Mazzini)의 님은 이탈리아다. 외솔의 님은 한글이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외솔 최현배(1894-1970)'. 남산 기슭 당신의 기념비 앞에서, '님'을 생각합니다. 당신의 '님'이면서, 우리 '님'입니다. 누구겠습니까. '한글'입니다. 당신은 오직 그 '님' 말고는 어디에도 눈을 두지 않으셨지요. 외로운 소나무를 자처하시며, 오로지 지조와 절개로서 '님' 하나 섬기는 일로 일흔일곱 해를 아낌없이 쓰셨습니다.

"봄맞이 반긴 뜻은 임 올까 함이러니/임을랑 오지 않고 봄이 그만 저물어서/꽃 지고 나비 돌아가니 더욱 설어 하노라." 춘향의 노래 같은 당신의 시조 한 토막에서 지독한 사랑을 읽습니다. 함흥감옥에서 지으셨다지요. '임'은 나라의 독립이면서, 한글의 광복인 것을 대번에 알겠습니다.

이제 당신을 잊었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기억하는 이들도 대개는, 괴팍한 한글학자나 고집스런 대학교수쯤으로 당신을 떠올릴 뿐입니다. 당신은 괜찮다고 하시는군요. 그러나 지금 제 귀에는 당신의 독백이 들립니다. "내가 잊히는 것은 섧지 않다. 내 '님'께서 홀대를 받는 것이 서글플 따름이다."

국어사전을 찾는 사람도 없고, 만드는 사람도 없습니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호루라기를 불며 나무라는 어른들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말들은 마구 만들어지는데, 당신이 지으신 것들처럼 겉과 속이 꼭 들어맞는 것은 드뭅니다. 말의 허리를 꺾고 비틀고, 상처를 입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저 역시, 말과 글을 공부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삶을 영위하는 자로서 부끄러운 날들이 많습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말과 글의 풍경에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저 커다란 호텔 간판만 해도 그렇습니다. 영어와 한글을 나란히 넣으면 오죽 좋으랴 싶습니다. '리틀 야구장'이란 말도 새로 짓고 싶어집니다.

어느새 삼월의 끝. 유관순 열사의 동상 앞을 지나오던 길에, 선생님 생각이 나서 들렀습니다. 그분의 일과 당신께서 하신 일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듣자 하니, 이와나미(岩波) 출판사가 '고지엔(?辭苑)' 7판을 낸답니다. 일본 사람들 국어사전의 대명사격인 책이지요. 왜 공연히 배가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연이어 떠오르는 궁금증. '여기 외솔기념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저 아래 장충단 공원이나 지하철 정거장에 안내표지 하나 만들 수 없을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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