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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84]임진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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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식량'. '박찬'(1949-2007)시인의 유고집입니다. 책을 받던 날 저는, 가슴이 많이 시리고 아팠습니다. 선배의 죽음을 속절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편물에 적힌 낯선 지명과 발신인 이름이 '그가 이제 여기 없음'을 확인시켰습니다. '마포구 연남동…박찬 시인 가족'.

그의 마지막 시집은 그렇게 '가족' 명의로 제게 왔습니다. 허전함을 달래려고, 누런 봉투의 글씨를 오려서 붙여놓았지요. 시인의 사진이 보이는 표지 안쪽입니다. 사진 속 그의 얼굴은 여전히 선하고 온유합니다. 현주소가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평안하리라 믿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가, 요 며칠 자꾸 눈에 밟힙니다. 지인의 '문자 안부' 한 통 때문입니다. "안녕하십니까./미황사입니다./잘 계시지요?//동백꽃이 많이 피었습니다./매화도 피었고요./문득 한번 내려오시지요./…." 언뜻, 보낸 이의 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위의 시집에 나오는 시, '봄 편지'였습니다.

시 한편이, 제 마음을 땅 끝 마을로 줄달음치게 합니다.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 언덕을 오르게 합니다. 달마산에선 제자 혜가(慧可)에게 '옷과 밥그릇'을 전하고는, 홀연 자취를 감춘 '달마'의 얼굴이 보입니다. 남해로 떨어지는 저녁 해가 황홀하고, 아침 안개가 그윽한 절이지요.

저는 절집 이야기를 즐깁니다. 팔도 명찰(名刹)을 다 본 것처럼 허풍도 곧잘 섞습니다. 석탑을 천개쯤 보았다고 자랑합니다. 어느 절 일주문이 물건인지, 어느 절 배롱나무가 몇 살인지 아는 체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종류의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어느 절이 제일이오?"
기다렸다는 듯이, 빛나는 절들 이름을 댑니다. '별(★)점'을 줍니다. "이 절은 별 세 개, 저 절은 두 개 반…!" 듣는 이는 의외란 듯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 유명한 절이 어째서?" "처음 듣는 절인데?" 당연한 반응입니다. 제 주관의 저울질이니까요. 전문가가 들으면 웃을 것입니다. 스님이 들으면, 가소롭다 할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지식으로 '침소봉대(針小棒大)'를 일삼는 딱한 중생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도 '입으로 짓는 죄(口業)'일 테지요. 저 세상에서도 '좋은 곳'과는 반대쪽 길을 예약해놓은 셈입니다. 그걸 알면서, 번번이 무책임한 채점을 합니다. "봄철의 미황사는 별 다섯 개!"


미황사는 그만큼이나 좋은 절입니다. 몇 년 전, 제 동료에게 그곳 템플스테이를 소개했습니다. 매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조카와 갔는데, 정말 좋았어요. 언제든 또 가고 싶어요. 천주교 '피정(避靜)' 느낌이랄까." 지금 그 절에 동백이 만개하고, 매화도 피었다니 어찌 아니 권하겠습니까.

봄맞이 명소를 추천해달라는 후배에게, 대답 대신 박찬 시인 시를 보냈습니다. 저부터 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언감생심'. 떨치고 나설 형편이 못됩니다. 아쉬워하면서 달마산을 그리워 할 뿐입니다. 문득, 그 절집 툇마루 섬돌 위에 쓰인 네 글자가 떠올랐습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밑을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먼 산을 그리워 할 것이 아니라, 동구 밖 사정을 살피라는 뜻으로도 읽혔습니다. 순간, 이곳 생각이 났습니다. '임진강 나루'. 흐드러진 봄 풍경도 좋지만, 이제 막 새 계절의 기운이 퍼지는 정경이 더 궁금해진 까닭입니다.

파주들판을 내다보려고 '경의선'을 탔습니다. 달마산에서 올라온 '춘풍(春風)'의 무리도, 이 기차를 탔을 것 같습니다. 더러는 저처럼 임진강 근처에 내려서 놀겠지만, 대개는 더 멀리 갈 것입니다.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가겠지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논밭에는, 봄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움직임이 부산합니다.

문산 역에서 내려, '반구정(伴鷗亭)'까지 걸었습니다. 만고의 청백리, '황희(黃喜)' 정승 계신 곳이지요. 제법 먼 길인데, 힘든 줄 모르고 왔습니다. 정자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봅니다. 봄볕에 반짝이는 물무늬가, 황 정승께서 벗하셨다는 흰 갈매기 떼를 생각나게 합니다. 저 햇살과 바람도 혼자 보기 아까워하셨을 어른이지요.

'성현(成俔)' 선생의 시 한 구절도 강물에 포개집니다. '…가소춘광비아유(可笑春光非我有)…'. 봄볕은 누구의 것도 아니란 말. 겨울이 비우고 간 자리마다 차별 없이 들어차는 푸른 기운이 고맙습니다. 제자리를 잊지 않고 돌아와 피는 꽃이 기특합니다. 제게도 이맘때의 강을 노래한 시 한편이 있습니다.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 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 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 졸시,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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