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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일보와 신문이라는 명칭들

최종수정 2017.06.05 07:53 기사입력 2017.06.04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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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보'라는 말을 써야 제대로 된 신문인 듯하던 때가 있었다. 조중동이 모두 '일보'이고 한국일보도 '일보'다. 지역지인 부산일보, 영남일보, 광주일보, 무등일보, 대전일보, 인천일보, 강원일보도 그렇다. 새롭게 진입하는 신문들은 대개 '일보'를 써서 비슷한 시늉을 하려고 했다. 세계일보,국민일보,문화일보가 비교적 늦게 시작했는데 모두 '일보'다.

1980년 5월24일 김재규 사형집행을 1면 톱으로 보도한 경향신문.

1980년 5월24일 김재규 사형집행을 1면 톱으로 보도한 경향신문.



'일보'가 지닌 관보(官報)같은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한겨레신문은 '신문'이란 말을 썼다. 앞선 것으로는 경향신문, 서울신문이 있었다. '신문'을 일보라 하지 않고 신문이라 할 때 많은 이들의 일감(一感)은 신문이 지니는 진중하고 권위적인 맛을 벗어난 상쾌함과 불안한 경박감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신문'이 붙은 제호가 생겨나는 과정은, 신문이 대중매체로 각광을 받으면서 어렴풋이 주체성을 자각하고 고유의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의욕같은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점에서, 그 이후 한겨레가 제호에서 '신문'이란 표현을 뺀 것은, 종이신문의 이미지를 아예 탈각하겠다는 선언과 같아 보인다. 한편 경제신문들도 상당수가 '일보'를 빼고 신문을 쓰거나, '경제'라는 말로 신문의 뉘앙스만 풍긴다.

'일보'가 지닌 무거운 느낌만 빼면서 날마다 배달되는 충직한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매일'이라는 말을 쓰는 신문도 생겨났다. 대구매일, 충청매일, 매일경제 따위가 그렇다.

일보는 daily report(일일보고,매일보고)를 번역한 듯이 보이지만, daily news(일일보도,매일보도)를 번역한 것이다. 24시간을 발행 주기로 삼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그 사이에 들어있는 뉴스를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담은 표현이다. 이것이 지금처럼 그 뜻도 가치도 증발되어 버린, 고식적인 종이매체들을 떠올리는 낱말이 될 줄을, 20년 전엔 정말 아무도 몰랐다.
요즘엔 일보보다 신문이란 말이 훨씬 적절해보인다. 24시간의 황금주기는 인터넷 때문에 느려터진 속도의 상징이 되었고 뉴스는 넘쳐나 그걸 생산한다는 자부심은 땅에 처박혀 있다. 경향신문, 서울신문이 그나마 이런 미래를 희미하게나마 예감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신문'이란 말 속에 너무나 깊이 밴 '종이'냄새 때문에 이것 또한 오래 가기가 쉽지 않을듯 하다. 대중들은 대중매체의 일방적이고 꼰대적인 뉴스 전달방식 전체를 거절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뉴스 전달은 굽신굽신 서비스에 애교 경쟁 서비스에 가깝다.

'주적 논쟁'을 다룬 2017년 4월21일자 신문.

'주적 논쟁'을 다룬 2017년 4월21일자 신문.



일보가 사라지고 신문이 사라지고, 온라인에 떠도는 수많은 '책임없는 찌라시'들을 그저 뉴스오락 정도로 보며 숨쉬는 인간들이, 이해하고 이미지화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대중이 등장하는 현대사 100년의 집단이성을 담당했던 신문이 사라지면서, 인간 사이의 소통과 논의 방식이 무섭게 바뀔 거란 짐작만 할 뿐이다. 생각의 준거와 흐름이 어디서 나오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개인은 알 수 없는, 익명의 빅브라더가 대중의 전뇌를 움직이는 만화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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