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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향한 손가락질 아래 자기를 가리키는 세 개의 손가락

최종수정 2017.06.04 04:01 기사입력 2017.06.0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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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시샘] 신봉승의 '일상'


자동차를 몰고 다니지 않을 때는
보행자였으므로
자동차를 매도하고,
자동차를 몰고 다닐 때는
운전기사였으므로
보행자를 매도하고,
자동차가 늘어나서 홍수일 때는
길이 뚫리지 않으므로
신호등을 매도하고,
모든 날, 모든 때
모든 것을 매도하면서
내게는 성한 곳이 없었다.


일상 / 신봉승


횡단보도 앞 경계석

횡단보도 앞 경계석



■ 시인 신봉승은 낯설지도 모른다. 드라마로 더 유명해진 소설 '조선왕조 500년'과 '한명회'의 작가라면 아하 그 사람!이라고 말하리라. 오래 전 회사의 한 선배와 역사의 관점에 대해 논쟁한 적이 있었다. 길고 격렬한 논란 끝에 콧김을 식히고 난 나에게, 선배는 책을 하나 가져다 주었다. 신봉승씨가 쓴 '양식과 오만'이라는 에세이집이었다. 사관(史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지하철에서 그 책을 읽고 있을 때, 점잖게 생긴 노인 한 분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참, 좋은 책을 읽고 계시네요." 나는 웃음을 지어보였는데, 그 뒤 내내 그 분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했었다. 그 책을 읽은 독자였을까. 개인적으로 신봉승씨를 알고 지내는 분이었을까. 학교 선생님이었을까. 그 다음 신봉승씨를 만난 건, 정동진에 갔을 때 시비(詩碑)에서였다. 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시인이기도 하구나 하는 걸 안 건 그때였다.
이 시는 참 소박하면서도 중요한 일상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내게는 성한 곳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거쳐온 삶 전부의 외상(外傷)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의 위 6행은 사실 신문편집기자들이 수습 시절에 배우는 '횡단보도의 역설'을 담고 있다. 기자의 관점이 어떻게 신문을 바꾸느냐를 말할 때 저 역설을 자주 인용한다.

오너 드라이버인 기자는 횡단보도가 많다는 기사를 써온다. 신호등에 자주 차가 막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걸어다니는 기자는 횡단보도가 적다는 기사를 써온다. 횡단보도까지 걸어가는 일이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두 기사가 사실은 같은 길을 얘기하는 기사였다. 자기가 어떤 위치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관점은 이렇게 바뀐다.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 / 사진=UPI 코리아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 / 사진=UPI 코리아



신봉승 시인은, 관점이 바뀔 때 우리가 타인에게 거침없이 내뱉는 매도에 관해 살핀다. 차를 몰고 있을 때는 차 앞에서 어물쩍거리고 있는 행인이 밉고 짜증난다. 반대로, 걸어가고 있을 때 사람을 칠 듯 사납게 차를 모는 운전자들을 보면 혈압이 돋는다. 과연 그렇다. 우리의 일상은 자기 위치 아닌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을 욕하고 폄하하고 인책하는 일로 채워져 있다.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만, 사실 인간의 관점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의 눈이 안에서 밖으로 뚫려, 남이 먼저 보이고 자신은 거울을 통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생물학적 특징이, 바로 그 관점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경우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입장이 바뀌면 금방 관점이 달라진다. 차를 사면 곧 보행자를 욕하는 대열에 선다.

내가 상대방을 향해 손가락질 할 때 한 개의 손가락 아래에 있는 세 개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상기하라는, 어느 스승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만고의 진리다. 손가락질은 다만 방향일 뿐이다. 우연히 내가 여기 있고 그가 거기 있기에 내 손가락은 그쪽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상대를 욕할 때, 곱하기 삼으로 내게 욕하는 셈이다. 힘 주어 쳐든 검지손가락 아래에 그늘져서 잘 보이지 않는 세 개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며 욕한다.

왜 욕하는가. 내가 이 자리에 계속 서있을 확률은 25%요, 앞으로 저 자리에 가게될 확률은 75%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되어 부모 속을 썩이면, 부모가 되어 딱 그 세 배를 앓아보면서 그때를 뉘우치고 그때야 부모마음을 깨닫는다. 남을 매도하는 우리의 삶이란 그래서 공평한 것인지 모른다. 신봉승은 저 숨은 세 손가락이 돌아와 자신에게 입힌 온갖 상처들을 앓는다.

몇해전 여름 강원도 대관령에 놀러갔다가 다시 그걸 깨달았다. 그 이전에 소형차를 몰고 갔을 때 가파른 산고개 도로를 오르지 못해 덜덜거리는 차를 보면서 얼마나 투덜거렸던가. 도대체 지자체 예산은 어디다 쓰는 거지? 길도 하나 제대로 못만드는 사람들이 '강원도의 힘'은 무슨. 좀 시원하게 뚫어놓으면 누가 잡아가나, 다시 오나 봐라. 이렇게 욕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관령 옛길을 걷는 여행이었다. 내가 욕했을 때의 희망사항처럼 새 길이 펑펑 뚫려 도로 위의 차들이 총알처럼 달리게 되었는데, 우리 일행은 살벌한 길을 피해서 느린 옛 길을 찾아 걸었던 것이다. 걸어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자연과 길은 역시 발바닥으로 느껴야 하는구나, 느리고 숨찬 걸음들과 함께 있어야 그 맛이 유지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그런데! 저쪽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산의 흉부가 총을 맞은 듯 뚫렸다. 터널이 지나간 자리다. 흉물도 그런 흉물이 없다. 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나무도 짐승도 인간의 마을도 모두 죽는다. 삭막해진 길 위에 오직 속도의 괴물 만이 으르릉거리며 살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상처에 시달리고 있다.

전에 내가 욕했던 건, 바로 지금 나를 욕한 것이고, 지금 내가 욕하는 건, 전의 나와 이 다음의 나를 욕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내 욕을 하며 돌아다닌다는 얘기다. 매도란 그런 것이다. 관점이란 그런 것이다. 신봉승 시인은, 그걸 상기시켜 준다. 내 몸에 상처내는 건 남이 아니라, 내 입에서 나간 칼과 총알들이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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