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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의 事와 史] 번역청 설립을 공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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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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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수영(1924~1968)은 1960년대에 쓴 글에서 '1930년'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했다. 1930년 이전에 태어난 '구세대'는 해방되던 1945년에 15세 이상이니 일제강점기에 중학교를 마쳤고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광복 후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교육을 받았다. 신생 대한민국에는 한글로 된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난관을 돌파할 묘책이 있었다. 일본어가 그들의 무기였다. 그들은 익숙한 일본어로 독서를 하면서 다양한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번역 왕국' 일본에는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의 주요 학문적 성과와 지식이 거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30년 이후에 태어나 일본어를 제대로 익힐 기회를 갖지 못한 '신세대'는 해독 가능한 언어가 한국어밖에 없었다. 미군 점령기를 거치면서 영어가 일본어를 대신해 급속히 제1외국어의 지위를 갖게 되었지만, 한국어와 문법 체계가 판이한 영어를 습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본어를 읽을 수 없는 문학청년들은 결국 세계문학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와 '한국어'라고 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글이라는 외딴 섬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김수영은 외국 고전을 우리말로 번역해 한글 콘텐츠를 일본어 못지않게 늘리는 일이야말로 국운(國運)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세대 문학청년들을 '뿌리 없이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혹평했다. 일본어를 못 읽어서 세계문학의 흐름에서 차단된 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지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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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은 한 나라의 학문 수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교토산업대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어서 여권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어밖에 할 줄 몰랐던 그가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어만으로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했음을 뜻한다.

 과연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한글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지적 성취가 가능할까? 물론 불가능하다. 어림도 없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글의 콘텐츠가 턱없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선진국이란 무엇일까. 모국어로 세계의 고급 정보와 지식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는 일본이 부럽지 않은가. 요즘 젊은 세대의 영어 실력이 좋아졌으니 영어로 읽고 쓰면 되지 않느냐고? 제아무리 영어 도사들이 많이 출현해도 그들이 '우리말'로 그들의 학식을 표현할 수 없는 한 그들은 '우리 문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일본 사회과학의 텐노(天皇)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는데 번역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단언한다. 일본은 이 작업을 정부 주도로 수행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ㆍ1868년) 직후 번역국(飜譯局)이란 국가기관을 설치해 조직적으로 서양 서적들의 번역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세기에 이미 서양의 주요 고전들이 대부분 번역됐다. 우리는 일본에 비해 100년 이상을 뒤졌다. 우리 번역사에는 '잃어버린 100년'이 가로놓여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이 이미 19세기에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시작한 일을 우리 사회는 지금도 그 필요성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선 정국이다. 선거판이 달아오르면서 네거티브 공방이 치열하다. 막말과 흠집 내기가 요란하다. 이런 시기에 번역청 설립 같은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인 공약을 발표하는 캠프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번역은 인문학의 뿌리다. 다 죽어가는 우리 인문학을 소생시키는 근원적 처방이자, 지식 민주화 운동의 발판이다. 이를 입증할 역사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정책이기도 하다. 이런 국가기관을 일본만 운영한 것도 아니다. 유럽연합(EU) 번역총국(Directorate-General for Translation), 캐나다 번역국(Translation Bureau) 등의 사례도 있다. 굳이 번역청 명칭을 고집할 것도 없다. 번역원, 번역국, 번역위원회 등도 좋다. 대한민국의 소프트파워를 뿌리부터 살려낼 수 있는 획기적 처방이다. 누가 번역청 설립 공약을 선점할 것인가.

박상익 우석대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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