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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신문사는 왜 4월7일을 기념하나요

최종수정 2017.04.07 10:38 기사입력 2017.04.0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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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날'에 생각해보는 19세기말 저항언론 아이콘 독립신문의 추억

신문사에선 4월7일이 '쉬는 날'이다. 물론 매일매일 발간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일부는 출근해야 하지만, 그래도 평일날 편집국에 모처럼 한가함이 감도는 날이다. 신문의 날은 언제 어떻게 생긴 걸까.

독립신문 사장겸 주필 서재필.

독립신문 사장겸 주필 서재필.



이 날은 독립신문의 창간기념일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7일 서재필의 주도로 만들어진 일간 신문이다. 정동에 있는 정부소유 건물을 사옥으로 빌려 창간호를 냈는데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4면을 발행했다. 영문판도 발행했으며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독립)'이란 지면 타이틀을 달았다. 여기에 사장겸 주필을 맡은 서재필의 영문판 사설이 실렸다.

국문판 편집은 주시경이 담당했다. 당시에는 기자라는 명칭 대신 탐방원(探訪員)이란 직함을 썼다. 발행부수는 3000부까지 늘어났다. ('영문판'은 200부). 당시엔 신문 낭독이 붐이었다. 시장에서 한 사람이 신문을 들고 읽으면 여러 사람이 함께 듣는 형식으로, 정보가 공유되었다. 서재필은 주필 월급은 한푼도 받지 않았다. 중추원 고문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려운 신문사 재정을 도왔다.

독립신문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3년여만에 폐간되었다. 1899년 12월4일의 일이다. 창간 당시 이 신문은 정부의 자금 지원으로 생겨났던 만큼 친정부적이었으나 1897년 봄부터 관료를 질타하는 논조를 지니기 시작했다. 개혁파와 수구파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 개혁파의 노선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해 겨울 서재필 추방이 확정되고, 윤치호가 주필 자리를 이어받는다. 윤치호의 시대는 독립협회(윤치호가 협회장이었다)의 기관지로 자주민권자강(自主民權自强)운동을 벌이면서 더욱 치열한 반정부 언론이 되었다. 1899년 1월 윤치호가 원산의 지방관리로 임명되면서 주필에서 물러나고 외국인이 맡았다.

정부는 논조가 희멀금해진 독립신문을 아예 없앨 작정을 했다. 쌓인 적자로 이미 힘겨워하는 이 신문사에게 빌려준 사옥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신문은 1899년 12월4일 종간호를 냈고 사장 서재필은 12월24일 사옥과 인쇄시설 일체를 4000원에 정부에게 양도한다. 대한제국기에 강력한 비판언론의 기억을 남긴 채 3년8개월만에 사라진 독립신문은 그 이후, 이 땅의 모든 언론인들에게 언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거울같은 것이었다.

독립신문

독립신문



1957년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초대회장 이관구)가 만들어졌다. 협회는 이튿날인 8일, 서울 시공관에서 독립신문 창간61주년 기념식을 갖고 신문윤리강령을 선포한다. 이후 언론계는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정했다. 그해 첫 신문주간의 표어는 '신문은 약자의 반려'였다.

이후 신문은 얼마나 늘어났을까. 작년인 2016년말 현재 등록된 일간신문은 399개다.(문화체육관광부 자료). 1960년 신문사는 112개까지 늘었는데, 5.16 이후 정부의 강제조정으로 38개로 줄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은 언론통폐합을 실시하여 29개로 줄여버렸다. 1988년 노태우의 6.29선언 이후 65개로 다시 늘었고 그 이후 증가세를 유지해왔다. 작년말 현재 인터넷신문은 6천360개로 집계됐다.

디지털뉴스본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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