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AD]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빈섬의 시샘]울분과 증오도 제풀에 주저앉은 삶의 풍경

최종수정 2017.04.06 08:39 기사입력 2017.04.06 08:39

댓글쓰기

신경림의 '눈길' - 우리는 왜 '미친 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올까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지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빗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 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 신경림의 '눈길'

[빈섬의 시샘]울분과 증오도 제풀에 주저앉은 삶의 풍경



■ 오래전 이 시를 읽을 때는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고 술집 아낙과 육백을 치는 일이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처럼 거룩하게 보였는데, 다시 읽으니 아니다. 다시 읽을 수록 시는 적막하다.

시 속에는 웃음과 울음이 엇갈려 나오는데도 음성 녹음이 되지 않은 영화 필름처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억장이 무너지는 실의와 절망이 오히려 이 고요를 만들었다.
신경림이 시를 접고 떠돌던 시절에, 양귀비를 수집하는 사람의 길 안내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들른 주막집에서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은 남로당이라고 총 맞아 죽고 혼자 술집을 차렸단다. 시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나서 생목 괴듯 시가 돋아올라 절필을 작파했다고 한다.

신경림이 만들어낸 저 풍경에는, 울분과 증오까지도 제풀에 식어 주저앉은, 이후의 삶이 있다. 이후의 삶에선 어떤 슬픔도 웃음 한 자락 길어올리는 일일 뿐이다. 웃을 때가 아닌데도 그저 미친 놈처럼 킬킬거릴 뿐이다. 저런 방식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건 동의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제 어머니 죽고, 우느라 눈이 퉁퉁 부은 얼굴도, 실없는 농담 하나에 꺼이꺼이 웃듯이, 어이없는 불행의 쓰나미 뒤엔, 저 ‘신경림풍의 헛헛한 평화’가 있는지 모른다. 여인이 신세타령을 늘어놓을 때 자꾸 웃음이 돋는 건, 기구한 타인의 고통을 일소에 붙이는 사내들의 허세이기도 하겠지만, 지나간 슬픔들은 사실 까닭없이 우습기도 하다. 삶은 갈수록 알 수 없다.

디지털뉴스본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