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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시샘]'한잎의 여자' 폐인

최종수정 2017.03.15 11:26 기사입력 2017.03.1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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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아름다운 피조물을 창조한 시인 오규원의 '물푸레나무 여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 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詩集(시집)같은 여자, 영원히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같은 슬픈 여자.


오규원 '한 잎의 여자.1'


모네의 작품 '정원의 여인'

모네의 작품 '정원의 여인'



# 빈섬의 시샘


1.
시인이란 일생 동안 딱 시 한편만 발표하기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시인은 한 편의 시로 남는다. 물론 몇 편으로 남는 시인도 있겠지만 그게 더 행복한 건 아니란 생각도 든다. 한 편의 시로 남은 시인은 그 언어의 기념비 위에서 행복하다.


오규원(1941-2007)은 저 시 한 편으로 가장 행복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았다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 나는 저 시를 달달 외웠을 뿐 아니라, 악보에 의지하지 않고 저 시를 노랫말로 곡을 붙여, 흥얼거리고 다닐 만큼 '한 잎의 여자' 폐인이었다. 저 시의 무엇이 좋았던가. 언어의 리듬감이 자아내는 열푸른 슬픔의 매혹에서 지금도 완전히 풀려난 건 아니다.

2.

누군가는 설명했다.

이 시는 우리가 명료하다고 하는 진술에 대한, 시인의 장난끼라고.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시는 수없이 많은 진술로 한 여자를 단정하고 있지만, 처음엔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던 여자가 갈수록 아리송하고 희미하고 어렴풋해진다는 얘기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는 그림이 그려지지만 그 여자가 이 시의 끝에 가면 실체가 사라지고 그림자만 남는다. 하나의 진술이 다른 진술을 부분적으로 부정해나갈 때 결국 수많은 진술들의 집합은 현실에서는 없는 '아름다운 무의미의 가건물'을 짓는다는 걸, 이 시는 기막히게 보여준다.

다 읽고 나면 그게 어떤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상에선 보지 못한, 마치 언어의 그림자로 빚어낸 질그릇같이 '너무 괜찮은 여자' 하나를 만난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이게 도대체 어떤 여자인가? 내가 이날 이때까지 찾아헤맨 건 저 세 문장이 희한하게 뒤틀어 기술해놓은 바로 저 여자였다. 여자 만을 가진 여자는 사실상 동어반복이고, 여자 아닌 걸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는 동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써 긍정을 강조한 진술이고, 두번째와 세번째는 여자를 규정하는 속성의 문제와 여자의 존재 그 자체를 말하고 있긴 하나, 앞의 '여자만을 가진 여자'에서 한 점 의미도 추가하지 못하는 변주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세 문장으로 말해놓고 보면, 갈수록 여자는 더욱 간절해지지만 처음에 찾아나선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결국 허공처럼 푸르른 기운만 남는다. 물에 우러난 푸른 빛처럼, 삶 내내 찾아헤맨 여자는 결국 없다. 남은 건, 여자를 꿈꾸고 말하고 누설하던 내 입과 정신 뿐이다.

늘 '첫사랑'만 하는, 사내의 갈증어린 삶이 저 주술같은 언어들에 회로처럼 숨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규원시인

오규원시인



3.


아무래도 내 언어가 문제 있나 보다. 후배에게 물어보니, 위의 설명들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중언부언해야겠다. 시는 처음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로 시작한다. 그런데 '쬐그만 여자' 뒤에 마침표가 찍혀 있지 않고 계속 쉼표로 연결된다. 그 연이 끝날 때까지 말이다. 내가 사랑한 한 여자에 대한 첫 설명은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이다.


계룡산 동학사 아래서 가슴을 멍들게 하는 초록빛의 물푸레나무를 만났다. 햇살을 담은 반투명의 초록들이 수천 개의 다른 빛깔의 눈으로 내려다 보는 그 그늘 아래 한참 서 있었다.


물푸레나무 한 잎은, 양 엄지손가락 모은 것 만한 크기의 잎이다. 물푸레나무 한 잎은, 시인의 눈에 비친 여자의 '작음'이 자아내는 귀여움의 상관물이다. 나는 물푸레나무 한 잎같은 여자를 강철수 만화의 백치미를 풍기는 목이 긴 여자로 생각한다. 그래, 어떤 이미지든 좋다. 한 여자의 이미지가 눈에 떠오른다.

[빈섬의 시샘]'한잎의 여자' 폐인



그런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수식하는 말들은 이미지를 대체로 명료하게 한다. 즉 사물을 구체화(SPECIFY)한다. 수식어는 렌즈의 포커스를 맞추는 것처럼 처음엔 흐릿했던 대상을 또렷하게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런데 오규원의 수식어들은, 그 반대다. 처음엔 언뜻 그림이 보였는데 갈 수록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왜 그럴까. 뒤의 진술이 앞의 진술의 부연설명이 아니라, 또다른 이미지의 개척이기 때문이다. 물푸레나무 잎의 솜털, 맑음, 영혼, 눈, 순결, 자유는, 어쩌면 물푸레나무의 것이 아니라, 시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이미지들을 공연히 물푸레나무에 얹은 것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계통이나 질서없이 중언부언의 형식으로 나타남으로써, 처음의 이미지를 간섭하고 산만하게 하고 결국은 휘발시켜 버린다.


뒤로 가면 더 하다. 앞에선 '물푸레나무'를 아리송하게 만들어버리더니, 이젠 '여자'를 휘발시킨다. '여자 만을 가진 여자'의 기막힌 TAUTOLOGY는 이 시의 정체와 꿈을 슬쩍 드러낸다. 앞의 여자는 '오규원이 생각하는 여자의 전부'이고, 뒤의 여자는 '물푸레나무 한 잎같은 그 여자'(오규원이 사랑한 여자)이다. '오규원이 사랑한 여자'는 '오규원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이미지들만 가진 여자'이다. 이런 여자를 오규원 이외에 누가 가질 수 있겠는가. 오직 오규원의 여자이다. 하지만 오규원도 가지지 못한다. 그런 여자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게 사랑하지 않던가. 오규원이 사랑한 여자는 세상에는 없는 여자이다. 있을 듯 있을 듯 했는데, 이미지로 뭉쳐지지 않고 달아나 버린 그 여자다. 그 여자는 물푸레나무의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다. 언어는 그 그림자를 끝없이 기웃거리며,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지만, 결국 대상에 접근하지 못한다.


오규원의 시에 깃들어있는, 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는 아름답다. 왜 그런가. 저 오규원의 문자와 행간을 떠나버리면 도무지 찾아낼 수 없는, 바로 저 언어 현장의 떨림같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결국엔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여자를 평생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시는 물푸레나무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나무의 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이 파래진다. 그래서 '물푸레'다. 봄에 꽃이 피고 9월에 갈색 열매를 매다는데, 다른 나무와는 달리 가지치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개나리나 이팝나무, 그리고 금목서, 은목서, 박달목서, 쥐똥나무가 다 물푸레의 사촌들이다. 물에 헹구면 물빛이 파랗게 변하는 저 맑은 여자는 오로지 오규원의 여자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질투한다.


지금 와서 읽으면서 느끼는 건, 저 여자는 바로 시(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여자를 시집같다고 말했으니, 그 여자는 시의 입술과 시의 젖가슴을 가진 여자이리라. 그렇게 읽어보니 물푸레와 병신같은 여자의 따뜻한 자의식이 꿰져 읽히는 듯 하다.

시를 사랑한 남자의 연애담이라면, '영원히 혼자 가지는 여자'는 아프고 절절하다. 자기 시집을 자기 혼자 가지고 사는 시인. 어쩌면 남의 시를 읽을 눈도 겨를도 바람끼도 없는 시대에서 혼잣말같이 시를 짓고 괴로워하며 가는 삶은, 눈물겹다.

디지털뉴스본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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