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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시샘]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최종수정 2017.03.12 11:01 기사입력 2017.03.1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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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연필로 쓰기' - 우리가 바꿔버린 것은 필기방식 뿐만이 아니라, 치열한 퇴고정신을 잃어버린 것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 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 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 정진규의 '연필로 쓰기'


원석연 作 '굴비'.

원석연 作 '굴비'.




■ 연필이 향나무와 흑연심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지는 건 그것이 이제 그리 자주 쓰이는 물건이 아니게 된 사정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향그런 영혼의 냄새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 몽당연필 자루를 코에 대고 깊이 향내를 맡았던 기억이 납니다. 연필 뒤에 달린 지우개는 방금 쓴 글씨를 다시 환한 여백으로 지울 수 있는 요술쟁이였지요. 손으로 직접 쓰는 행위가 귀하여진 요즘에, 뭔가를 쓴다는 행위는 영혼이 행하는 아름다운 일같습니다. 이 행위가 그 수단인 연필에 투영되어, 향그런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같은 냄새를 맡았으되, 시인은 사각거리는 연필심 끝에서 일어나는 문자의 승화를 느낀 겁니다.

이중섭, '네어린이와 비둘기', 1950년대, 종이에연필, 31.5x48.5cm

이중섭, '네어린이와 비둘기', 1950년대, 종이에연필, 31.5x48.5cm



쓴다는 일과 그것을 다시 지울 수 있다는 일은 우리를 안심하게 합니다. 한번 한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삶의 지독한 일회성들이 우리의 선택과 길을 늘 불안하고 힘겹게 해왔지요. 연필은 볼펜이나 만년필처럼 한번 쓰면 버리기 전에는 절대로 새롭게 백지화할 수 없는 무뚝뚝한 필기구가 아니라, 몇번 쯤은 실수를 용납하는 부드럽고 너그러운 물건입니다. 그런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이 어쩌면 치열한 퇴고와 진지한 내성을 키워왔는지 모릅니다. 연필이 사라지면서 우린 그런 정신마저 내주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파버카스텔 연필

파버카스텔 연필



밤에 홀로 연필을 깎는 일은, 뭔가를 쓰기 위한 준비입니다.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 이토록 적실한 행동으로 그려질 수 있을까요. 깎여져나가는 향나무 부스러기들을 손으로 쓸며, 혹은 심을 비스듬히 세워놓고 사각사각 벼뤄 날카롭게 하는 일은, 돌이켜보면 설레고 감미로운 일입니다. 글쓰는 일이란 이런 향그런 예열 작업을 거쳐 영혼의 일로 들어가는 것이었지요. 이런저런 생각이 저절로 풀려나와 버렸지만, 그렇다고 정진규의 이 시를 기꺼워하는 건 아닙니다. 시의 미덕보다, 추억과 사유를 도발하는 잠언적인 미덕을 더 갖추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김덕미 작 '그녀'.

김덕미 작 '그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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