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AD]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지용은 왜 모국어의 국보인가

최종수정 2017.03.11 01:10 기사입력 2017.03.11 01:10

댓글쓰기

[빈섬의 시샘]정지용의 '비'를 읽는 놀라움과 즐거움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섯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산새 거름 거리.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 정지용의 '비'


오늘날씨. 꽃샘추위

오늘날씨. 꽃샘추위



■ 편집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30초 짜리 광고 한편을 보는 듯한, 세련되고 감각적인 동영상이다. 정지용에게 혀를 내두르게 되는 시 중의 한 편이다. 물론 이 시에 대한 논란들은 좀 있다. 그 중에, 과연 계절이 언제냐 하는 논란도 있다. 그 대답에 따라, 연상되는 이미지가 전혀 달라지게 때문에 중요한 논점이다. 혹자는, '붉은 닢'에 의미를 두어 가을이라고 본다. 흔히 붉은 닢은 단풍이다. 그러나 혹자는 '소소리 바람'에 무게를 두어, 봄이라고 말한다. 소소리 바람은 "이른 봄에 살 속으로 기어드는 듯 맵고 찬 바람"이다. 계절을 가을로 보는 학자들은, 소소리 바람을 그냥, 회오리 바람으로 해석한다. 봄으로 보는 학자들은 '붉은 닢'을 '붉은 꽃잎'으로 해석한다.

나는 '가을說'에 슬며시 기운다. 소소리 바람이 과연 이른 봄에 부는 살을 에는 바람이라면, 붉은 꽃잎이 피어있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다. (동백이라는 예외가 있긴 하다. 그러나 살을 에는 바람이 여전히 부는 때라면 '비'보다 눈이 걸맞지 않나 하고 '내 의견'을 다져본다. 대체로 봄비는 푹한 느낌을 만들어낸다.그리고 붉은 꽃잎을 그냥 아무 단서 없이 '붉은 잎'이라고 표현하는 일도, 어쩐지 어색하다. 하지만, 무대가 봄일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그게 시적 모호성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소소리 바람의 제대로 된 쓰임새에 집중하다 보니 맥락 전부에 약간의 무리가 갔다는 내 주장은,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않길 바란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 대로 소소리 바람은 '회오리 바람'의 방언이라는 주장이 시의 잎맥을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한다고, 내가 본다는 것 뿐이다.


지용은 왜 모국어의 국보인가


이제 그 이미지의 움직임을 따라가보자. '돌에 그늘이 차다' 할 때의 '차다'는 寒이 아니라(중의일 수는 있겠지만) 滿이다. 돌에 원래 햇살이 있었는데 먹구름이 몰리면서 슬며시 그늘로 가득 찼다. '따로 몰리는'이란 회오리 바람의 특징이다. 일제히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여기 불었다가 저기 불었다 하면서 숲 전체가 설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앞 섯거니 하야/꼬리 치날리여 세우고,//죵죵 다리 깟칠한/산새 거름 거리. 이 네 줄의 행은 산새와 바람에 대한 묘사다. '앞 섯거니'는 소소리 바람의 앞에 서있는 듯한 산새 한 마리를 표현한 말이다. 바람이 산새 뒤 꽁무니로 휙 불어갔다. 그러자, 산새는 바람을 리드하는 것처럼,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데 그 풍력 때문에 꼬리가 치솟아 올랐다. 꼬리가 치솟으니 가늘게 벋은 다리가 더 잘 보이지 않는가. 이 묘사에서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의 <향수>보다 나는 이 대목의 감각적 회화성을 윗길로 친다. 저 새는 밀려서 앞으로 종종걸음을 치기까지 하지 않는가. 바람의 힘에 비하면 새의 다리는 얼마나 가늘고 부실해 보이는가. 금방 날려갈 듯 하다. 그러니 '깟칠'하다. '거름 거리'는 새를 떠민 바람의 힘을 그려낸 기막힌 스냅이다.

여울지여/ 수척한 흰 물살//갈갈히/ 손가락 펴고. 이 문장의 주어는 '물살'이며 술어는 '손가락 펴고'이다. 물살이 손가락을 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다음 구절의 <멎은 듯 새삼 돋는>을 보면 여름비처럼 좍좍 따르는 비는 아니다. 찔끔 왔다가 멈췄다. 그때 어떤가. 바싹 말랐던 고랑에 물길이 생긴다. 수척하다는 건 야위었다는 얘기니 물살이 세차거나 두텁지 않고 좁직하게 물꼬를 밀고나간다는 뜻이리라. 처음에는 없던 물길이 생겼다. 그것이 '여울지여'다. 그래서 흰 물방울의 움직임으로 가늘게 생긴 물길이다. '갈갈히' 손가락을 편다는 건, 물이 힘있게 하나의 줄기로 흐르지 못하고 아직은 실금처럼 좁은 흙고랑들 사이사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흐른다는 얘기가 아닐까. 좋은 햇살 끝에 바싹 건조한 땅에 비가 막 후둑이기 시작할 무렵을 붙잡는 영사기다.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붉은 닢 닢/소란히 밟고 간다. 주어는 '비의 낯'이고 동사는 '밟고 간다'이다. 비의 낯은, 비의 '낱줄기' 하나하나를 말하는 해석에 동조하고 싶다. 그쳤다 다시 뿌리는 비. '돋는'을 '듣는'의 표기 오류로 보는 이도 있다. 이때 '듣다'는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돋는'을 오류로 보지 않고 닢 닢에 돋아나는 빗줄기로 보는 관점도 있는데, 내겐 그 해석이 무리해 보인다. 만약 그런 표현이었다면 저 언어 마술사 정지용이 '새삼 비ㅅ낯 돋는//붉은 닢 닢'으로 했으리라.

그렇지 않고 굳이 빛ㅅ낯이 주어가 되게 처리한 것은, '돋는'이란 말이 그 행 바깥의 묘사에 의지하지 않고도 완전한 표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돋는 비ㅅ낯'은 '새싹처럼 볼록 돋아나는'이란 의미로서의 '돋는'이 아니라, 단순히 '생겨나는'이란 의미로 쓰였을 수 있다. '새삼 생겨나는' 빗줄기다. '돋는'은 바로, 감각이 인식하는 그 섬세한 경계를 말하고 있다. '멎은 듯'이란 말은, 사실은 멎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빗줄기가 워낙 가늘어져서 멎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문득 다시 빗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의 아웃포커싱(멎음)이나 클로즈업(돋음) 기법처럼 사라지고 보이는 그 인식의 경계점이다. '새삼' 두 글자가 그걸 붙잡는다.안보이다가 문득 보이는 빗줄기. 왜 그럴까. 빗방울이 약간 굵어졌기 때문이다.

그 빗줄기가 붉은 닢을 밟는다. 그냥 밟는 게 아니라 '밟고 간다'. 여기서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 것은 '밟고 간다'이다. 지금 막 다시 따르기 시작한 빗줄기는 아까 소소리 바람의 이동처럼 급히 움직여간다. 그러니까 이쪽 단풍이 빗줄기에 살짝 눌려 흔들렸다가 다시 그 옆의 단풍 쪽으로 옮겨가고 다시 옆으로 옮겨가고. 그것이 운동장의 마스게임 때의 카드섹션처럼 절묘하게 움직여 간다. 그게 바로, '밟고 간다'이다. 어떻게 밟고 가나? 후두두둑 소리를 내며 소란스럽게! 후두두둑? 그건 바로 단풍잎을 밟으며 뛰어가는 빗줄기의 발자국 소리다.

이 시의 매력은 두 개의 고비를 지닌다. 하나는 '죵죵 다리 깟칠한/산새 거름 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새삼 돋는 비ㅅ낯...닢 닢 밟고 간다'이다. 소름이 돋는 저 언어, 즉물적 감각 재현. 오오, 정지용. 세종 이후의 모국어 국보!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