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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 성불사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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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전 주필

박명훈 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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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효서의 중편소설 '풍경소리'는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가곡 '성불사의 밤'의 첫머리 가사인데, 소설 속의 성불사가 그 성불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윽하고, 맑고, 여운을 길게 남기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보면 같은 성불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적한 산사에서 이뤄지는 쓸쓸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담은 풍경소리는 2017년 제41회 이상문학상 대상수상작이다. 한 심사위원은 '우리는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가라는 만물의 시원에 대한 여정'이라 평했다. 다른 심사위원은 '한국소설이 여기에 이르렀구나, 한글의 아름다움이 선(禪)의 모습이리라고 받아드려졌다'고 말했다.
 연필로 종이에 슥삭슥삭 적는 소리, 스와와와 팽나무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 형광등을 끄고 촛불을 켜면 창살문에 어른거리는 풍경그림자, 띵강띵강 또는 땡강땡강하는 풍경소리. 너무 커서 들을 수 없는 소리--. 산사의 소리와 풍경을 글을 통해 듣고 그리며 한글의 아름다움에 선을 떠올렸다는 심사위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설을 읽은 후에도 떠나지 않는 인상적인 대화가 있다. 주인공 미와가 성불사에 온 첫날 공양주 좌자에서 물었다. "왜 좌자에요?" 좌자가 정색하고 뚝뚝 끊어서 말했다 "이곳에서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 성불사에서는 누구도 '왜'라고 묻지 않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왜라는 말을 빼고서도 모든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미와는 금방 알아차렸다.

 '왜?'라고 묻는 대신 '그렇군요'라고 받아드린다. "아, 이름이 좌자군요"하는 식이다. 문학평론가 장두영은 이를 두고 '남에게 답을 구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화두로 삼아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뜻은 아닐까' 짐작했다. 왜?라는 도발적 질문이 없으면 대화는 부드러워지고 생각은 깊어진다. 상대방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배려와 이해의 공간이 생겨난다.
 소설을 읽은 후 실제로 왜? 대신 그렇군!이란 표현을 써 봤다.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왜?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해서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상대방이 말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의 대부분을 상대가 스스로 들려 주었다. 언쟁이 있을 법한 내용을 놓고서도 좋은 분위기 속에서. (물론 청문회에서 봤듯 숨기고 속이려는 자에게는 통할 리 없겠지만)

 소설 풍경소리를 떠올린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팽팽한 긴장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운명의 시간이라는 말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선고가 초읽기에 들어간 때문이다. 결과에 따라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갈등과 대립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조돼 왔다. 어떤 선고가 나오더라도 왜?를 외치는 거친 소리가 나올 개연성이 큰 이유다.

 반전은 없을까. 왜?라며 불복하기보다 그렇군, 헌재 판단이 그렇군, 하면서 받아드리는 모습. 그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 진화의 새 역사로, 통합의 출발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탄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탄핵이후다. 민생은 늪에 빠졌고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의 골은 한층 깊어졌다. 설상가상 우리 힘으로 통제키 어려운 위험이 몰려온다. 북핵 위협, 중국의 사드 보복, 트럼프가 쥐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카드, 거세지는 세계 보호무역 파고.

 총체적 위기상황에서도 가식적 미소를 남발하는 대선주자들, 누가 되든지 다음 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경고의 소리를 듣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박명훈 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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