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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시샘]쇠별꽃을 듣는 귀

최종수정 2017.02.23 08:25 기사입력 2017.02.2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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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의 '꽃보다 작은 꽃', 이 놀라운 귀명창을

비 멎은 고요한 봄 하늘 아래
꽃의 이름으로 핀
가장 작은 꽃이 있다면 너였으리라
안료가 오들오들해진 대지의 화폭에
미묘하게 돋아난 뾰루지 같은 꽃
대롱 속 바람소리처럼 텅 비어
쉼 없이 어룽거리기만 하니
누가 저 꽃의
꽃봉오리 움트는 소리를 들었단 걸까
휘황한 햇빛 아프도록 등에 지고도
쪼그려 앉지 않으면
끝내 보이지 않는 꽃
산그늘 무거운 이 땅의 장삼이사들
봄 하늘에 떨군
눈물방울들이 저만 했으리
은하의 여울이 봇도랑에 흐르고
풀섶에 반짝이는 뭇별들의 섬광,
생의 잔뿌리들 이따금 들이켜는 먼 물소리

김명리 '꽃보다 작은 꽃- 쇠별꽃을 위하여'


김명리시인

김명리시인



쇠별꽃은 '소(小)별꽃'이란 뜻의 일본식 이름이라 합니다. 저것을 시골에선 잣나물이나 콩버무리라 한다는데, 그건 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니 저 별모양의 꽃을 부르기엔 마땅히 쇠별꽃만한 것도 없군요.

김명리시인의 시 '꽃보다 작은 꽃'은 이 세상에 생명을 받아 피어난 것 중에 몹시도 작은 이 꽃 앞에서, '작음'이란 무엇인가를 곰곰히 살핍니다.

어찌 하여 이 꽃은 이리도 작게 태어났을까. 일본의 작은 전자기기의 부품처럼 작은 사이즈에도 완전한 형상을 지닌 생명체의 정밀한 세공을 바라보노라면 초미니 꽃을 디자인하고 있는 섬세하고 정밀한 창조주의 손길에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큰 것을 만드는 뜻이 있듯이, 이 작은 것을 그토록 공들여 이토록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솜씨에도 뜻이 있지 않을지요.

안료가 오들오들해진 대지의 화폭에
미묘하게 돋아난 뾰루지 같은 꽃

물감이 오들오들해졌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추위에 떠는 오들오들함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고, 밥알이 꼬들꼬들한 것 같은 말맛을 살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정확히는 알기 어렵습니다. 안료가 살짝 굳어진 화폭이라고 보면 봄날의 촉촉한 흙기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미묘함과 뾰루지는 모두, 이 꽃의 작음에 대한 형언이며 경탄입니다.

쇠별꽃

쇠별꽃



대롱 속 바람소리처럼 텅 비어
쉼 없이 어룽거리기만 하니
누가 저 꽃의
꽃봉오리 움트는 소리를 들었단 걸까
휘황한 햇빛 아프도록 등에 지고도
쪼그려 앉지 않으면
끝내 보이지 않는 꽃

시인은, '작음'이 만들어내는 신비함을 쫓아갑니다.

이 작은 꽃의 봉오리가 터질 때 그 소리를 듣는 귀가 있을까요. 저 작은 꽃을 밀어올린 꽃대 속엔 무엇이 있을지. 그 꽃대의 허공 속을 지나온 바람은 저 꽃을 피울 때까지 쉼 없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어룽거리는 것은 어른거리는 것과 비슷하게 또렷이 보이지 않지만 흐릿한 형상을 감지하는 것이죠. 저것이 어룽거리는 까닭은, 워낙 작아서 웬만한 시선으로는 자세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생각한다면 저 꽃 하나가 피어나는 순간은, 우리가 도저히 알아챌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의 찰나가 아닐 수 없겠네요. 그 순간의 소리를 들은 귀. 그걸 들은 이는 누굴까요.

그렇게 피어난 꽃이 마침내 봉오리를 열었을 때 그 작고 하얀 꽃잎 사이로 우주 사이즈의 거대한 햇빛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 거대한 빛의 무게를 지고 있는 쇠별꽃. 우주 최대의 조명이 그 작은 꽃 하나를 위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지만, 지나가는 뭇사람의 눈에는 그 꽃이 쉽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꽃의 낮고 작은 세상으로 쪼그려 앉아 어룽거리는 생명의 낌새를 가만히 들여다보이지 않으면, 쇠별꽃은 지상에 떨어져 있는 작디작은 별 하나처럼 깜박이며 사라지는 것이 아닐지요.

산그늘 무거운 이 땅의 장삼이사들
봄 하늘에 떨군
눈물방울들이 저만 했으리

작음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시인은, 무명(無名)과 무명(無明)의 보편적인 살이에로 눈길을 비약합니다.

이름 없는 것, 어둑어둑한 것. 산그늘 무거운 음지에 겨우 피어난 장(張)씨 성을 가진 셋과 이(李)씨 성을 가진 빈섬같은 자 넷. 보통의 허접한 인생들.

그늘살이가 힘겨운지라 봄 하늘에 눈물방울께나 떨궜으리라. 하지만 눈물방울인들 슬픔을 적실 양도 못되는 희미한 수분이었으리. 그 있는 둥 마는 둥한 물기의 반짝임, 그게 쇠별꽃의 사이즈가 아닌지요.

은하의 여울이 봇도랑에 흐르고
풀섶에 반짝이는 뭇별들의 섬광,
생의 잔뿌리들 이따금 들이켜는 먼 물소리

쇠별꽃의 반짝임에서 이름 없는 인간들의 가뭇없는 자취를 발견하고 나니 마치 그 작은 꽃이 핀 그곳이 거대한 우주와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옆에 흐르는 봇도랑은 은하의 여울 같고, 풀섶의 이슬이나 풀자락의 반짝임은 뭇별들의 섬광 같습니다.

그리고, 저 마지막 말. 생의 잔뿌리들 이따금 들이켜는 먼 물소리. 이제야 조물주의 조심스럽고 정밀한 귀가 되어 비로소 저 기적의 물소리를 듣습니다.

꽃봉오리를 피워내던 꽃대의 바람소리를 듣던 그 귀의 청력을 돋워, 저 작은 꽃이 감춘 땅바닥 속에 오글거리며 스며들어 있을 잔뿌리들에 귀 기울입니다.

아 참, 시의 맨처음에 등장하는 '비 멎은'이란 표현에 주목하기를. 마침 땅이 촉촉해져 있겠죠. 이때를 기다려 실뿌리의 자잘한 발끝으로 힘껏 빨아올리는 물기. 그 수분이 잔뿌리를 통해 꽃대로 올라오는 소리.

쇠별꽃을 보면서 그 소리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어낸 조물주 급의 귀명창이 김명리 시인 말고 또 있으시다면 손들어주시기를.

디지털뉴스본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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