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의 ‘김형석’이 맞았다. 우리 나이로 97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육필로 최근에 펴낸 책의 제목은 그와 딱 어울리는 ‘백년을 살아보니’였다. 행복론으로 시작되는 책을 천천히 넘기다가 손이 멈추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라는 항목에 들어있는 ‘손기정 옹이 세무사를 찾은 이유’라는 소제목의 글이었다. 가슴을 쿵하고 때렸다. 책을 덮었다.
<최 세무사는 조금 전에 손기정 옹이 다녀가셨다고 얘기하면서 그분을 보내드리고 나서 자기 마음이 무거운 반성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다. 손 옹이 찾아와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내가 요사이 어디서 상금을 받은 것이 있는데, 세금을 먼저 내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왔는데 좀 도와주면 좋겠어"라고 했다. 세무사가 "선생님은 연세도 높고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신고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지금까지 한 평생 얼마나 많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고 살았는데, 세금을 먼저 내야지. 내가 이제 나라에 도움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아?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무사가 세금을 계산해 보여드렸더니 손 옹은 "고것밖에 안 되나? 좀 더 많이 내는 방법으로 바꿀 수는 없나?"하고 요청해 왔다. 세무사가 다시 법적으로 가장 많이 낼 수 있는 방법으로 계산해 드렸더니 그제야 만족해하면서 "됐어, 그만큼은 내야지, 그래야 마음이 편하지."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나라가 어려우면 우리는 한탄한다. 왜 우리에게 진정한 지도자, 큰 어른은 없는가. 미국처럼 세금을 올려달라는 기업인은 없는가.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는 시국이다. 비상한 상황에서 기대고 위안을 받을 인물이 없다는 현실은 국민을 더 깊이 절망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어떻게 숱한 시련과 절망, 집권자의 배반 속에서도 나라는 버티고 발전해 왔을까. 그 답을 손기정 옹의 일화에서 읽는다. 권력자, 목소리 큰 정치인, 절세에 골몰하는 기업주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사람들, 이웃과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대다수, 그들이 나라를 이끌어 온 진정한 리더였다. 그들이 희망의 출발점이다. 지금의 국가적 시련에서도 그렇다.
박명훈 전 주필 pmhoo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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