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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발견]안견 최고작품은 '청산백운도'

최종수정 2015.11.13 11:02 기사입력 2015.11.1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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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 '사립독조'(간송미술관 소장)

안견 '사립독조'(간송미술관 소장)

안견은 '몽유도원도' 하나로 이 땅에서 가장 빼어난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작품은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였다. 안견보다 몇십 년 뒤의 사람인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궁궐에 소장되어 있는 청산백운도를 보았는데 진실로 더없는 보배였다." 안견 자신도 "나의 평생의 정력이 이 작품에 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한다.

성종실록에도 이 그림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왕이 1479년 2월에 청산백운도를 꺼내놓고 신하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했다. 그때 지은 시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가히 양공(良工ㆍ뛰어난 예술가)의 모사(模寫)가 교묘한데, 누가 이경(異境ㆍ다른 나라, 중국을 의미)을 옮겨 그리기가 어렵다 했나."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비부(秘府ㆍ왕실도서관)에 신품(神品)이 전한다고 들은 지 오래되었네." 조선 초 당시 송나라 곽희 화풍에 대한 열광이 있던 것을 감안하면, 이 그림 또한 그 지역의 승경(勝景)을 표현한 대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 이 작품이 왕실에서도 귀하게 소장하는 작품이었으며, 조선이 자랑할 만한 최고의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 왕이 그림을 꺼내와 펼쳐놓고 신하들에게 시를 읊게 하는 장면은, 이 작품에 대한 왕국의 자부심과 애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아쉽게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왕실에 특급 보배로 보관되어 신품(神品)이라 극찬을 받았고 안견 자신 또한 기꺼이 대표작으로 꼽았던 청산백운도를 보고 싶은 '눈의 갈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안견을 당대 한ㆍ중ㆍ일을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고 빼어난 화가로 만들었던 명성 또한 이 작품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역대 왕들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그림을 펼쳐 보이며 조선 문화의 진수를 과시했을 것이다. '모사(베껴 그림)가 교묘하다'는 표현으로 상상해볼 때, 자연 풍광을 정밀하게 담았으며 곽희의 원근법인 3원법(고원법ㆍ평원법ㆍ심원법)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었을 것이다. 청산백운이란 화명(畵名)을 본다면, 색채 또한 곁들여 생생하게 실감을 돋웠을지 모른다. 김안로(1481~1537)는 '용천담적기'에서 "안견은 곽희풍으로 그리면 곽희가 되고 이필풍으로 그리면 이필이 되었고 유융이나 마원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하고 있다. 곽희는 북송 사람이고, 마원은 남송 사람이며, 이필이나 유융은 원나라 화가들이다. 그는 다양한 중국 화풍을 마스터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안견 화풍'을 만들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이 청산백운도를 펼쳐놓을 때, 그림 하나를 더 가져왔는데 그것은 '설경도(雪景圖)'이다. 이 그림 또한 안견 작(作)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행방은 알 수 없다. 대신 조선 초기 인물화의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사립독조( 笠獨釣)'라는 그림이 전칭 작으로 남아있는데(간송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보다 큰 작품의 일부인 듯하다. 노인의 옷자락은 거칠게 표현되었고 얼굴과 손은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강렬한 인상을 준다. 사립독조가 당나라 유종원의 시 '강설(江雪)'에서 따온 것(고주사립옹 독조한강설ㆍ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인지라, 이 그림은 천 개의 산(千山)과 만 개의 길(萬徑)이 그려진 대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그림이 설경도일 근거는 미약하지만, 이 그림으로 그 장쾌하고 정밀하며 거대한 화폭을 상상해볼 수는 있으리라.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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