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에도 이 그림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왕이 1479년 2월에 청산백운도를 꺼내놓고 신하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했다. 그때 지은 시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가히 양공(良工ㆍ뛰어난 예술가)의 모사(模寫)가 교묘한데, 누가 이경(異境ㆍ다른 나라, 중국을 의미)을 옮겨 그리기가 어렵다 했나."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비부(秘府ㆍ왕실도서관)에 신품(神品)이 전한다고 들은 지 오래되었네." 조선 초 당시 송나라 곽희 화풍에 대한 열광이 있던 것을 감안하면, 이 그림 또한 그 지역의 승경(勝景)을 표현한 대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 이 작품이 왕실에서도 귀하게 소장하는 작품이었으며, 조선이 자랑할 만한 최고의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 왕이 그림을 꺼내와 펼쳐놓고 신하들에게 시를 읊게 하는 장면은, 이 작품에 대한 왕국의 자부심과 애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할 만하다.
성종이 청산백운도를 펼쳐놓을 때, 그림 하나를 더 가져왔는데 그것은 '설경도(雪景圖)'이다. 이 그림 또한 안견 작(作)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행방은 알 수 없다. 대신 조선 초기 인물화의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사립독조( 笠獨釣)'라는 그림이 전칭 작으로 남아있는데(간송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보다 큰 작품의 일부인 듯하다. 노인의 옷자락은 거칠게 표현되었고 얼굴과 손은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강렬한 인상을 준다. 사립독조가 당나라 유종원의 시 '강설(江雪)'에서 따온 것(고주사립옹 독조한강설ㆍ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인지라, 이 그림은 천 개의 산(千山)과 만 개의 길(萬徑)이 그려진 대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그림이 설경도일 근거는 미약하지만, 이 그림으로 그 장쾌하고 정밀하며 거대한 화폭을 상상해볼 수는 있으리라.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