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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詩]장석주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중에서

최종수정 2013.12.11 11:14 기사입력 2013.12.1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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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난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내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한참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작은 옷은 곧 못입게 되지, 하며/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큰 바위를 버거워 했다/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나가버리고/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매음녀처럼 껌을 소리나게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장석주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중에서

■ 바지에는 직립의 고단함과 가위로 벌려 안정시킨 높이의 불안이 있다. 바지에는 뿌리내리고자 하는 식물성 자아를, 애완용 강아지에게 입힌 저고리처럼 서럽게 감싼 본질적 모성이 있다. 어떤 자존심 강한 사람도 바지를 벗으며 상승할 순 없고, 바지를 입으며 주저앉을 순 없다. 어떤 바지도 발을 통과하지 않고 입을 순 없지만, 많은 바지들은 발을 챙겨주진 않는다. 다만 인간의 가지를 돋보이게 하는 너에겐, 핫바지나 바지사장 같은 가엾은 멸시가 있다. 화장실은 늘 바지에 관한 심문이다. 바지의 중심이 심각하게 뜯어진 상태로, 인간의 활약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나와보라.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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