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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산책]'나가수'가 매주 묻는다 "너는 누구냐?"

최종수정 2018.09.11 17:01 기사입력 2011.05.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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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하는 충무로산책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형 액자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던 거 같다.
"경쟁이 꽃피는 아름다운 사회"
과천종합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접견실 한쪽 벽에 큼직하게 걸려 있던 액자였다. (공정위는 2008년 3월 과천을 떠나 지금 있는 곳, 즉 강남성모병원 앞 옛 기획예산처 청사로 옮겼다.)

30대 후반, 매일 매일 1면 톱과 3면 박스, 그리고 '면 톱'을 누가 쓰느냐를 놓고 편집국 또는 경제부 동료들과 다투고, 다른 신문사의 같은 출입처 기자들과 경쟁하고, 기사내용이 맞네 틀리네 출입처 사람들과의 물고물리는 숨바꼭질이 일상이던 현장기자 입장에서 "저게 도대체 말이 돼?"하고 생각했다.

어떻게 피비린내 나는 경쟁을 꽃에 비유한단 말인가?
어떻게 경쟁을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가?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니들이 경쟁을 알기나 해!"

기자실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하루 온종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대던 우리는 "아, 지긋지긋한 이 놈의 경쟁, 기사만 안 쓰면 기자도 참 할 만한 직업인데..."라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누가 물으면 "기자"라고 대답하면서 살았다.

15년 동안 그 액자를 까맣게 잊었다. 당연히 '경쟁'과 '아름다운 사회'도 잊고 살았다.
일요일 오후, 헐렁한 셔츠에 파자마만 입은 채 거실에 널브러져 TV를 보던 중 갑자기 그 액자가 떠올랐다.

7명의 가수가 한 명씩 나와 노래 부르고, 500명의 청중이 그 중 '인상적이었던' 3명을 찍고 집으로 돌아갔고, 무대에 다시 7명의 가수가 불려나오고, 이윽고 1등에서 7등까지 순위가 발표되는,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한 구성.
(기사써서 넘기고, 그 기사가 활자화되고, 독자들이 수많은 신문 가운데 한두개 골라 읽고, 하루만 지나도 신문은 신문지가 되고, 이윽고 먹고 난 자장면 그릇과 함께 실려나가는, 그 단순한 반복.) 

15년의 결혼생활을 숨긴 채 살아가다 새 애인과 '새 출발'을 꿈꾸며 50억원짜리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인생만사 애닯은 스토리도, 외국출장에서 돌아오다 공항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그래 맞아, 1000억원 투자했다가 날렸는데, 개인돈이었어"라고 쿨하게 해명하는 클라이맥스도 찾기 힘든 아주 단순한 프로그램을 보면서 왜 내 눈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던 것일까?
왜 중간 중간 눈부신 생의 환희와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일까?

누선을 자극한 (내 나름의) 몇 가지 포인트는 있었다.

십수년씩 노래를 불러온 기성 가수들이 갑자기 찾아온 진검승부에 온 몸을 떨며 긴장과 흥분을 맛본다는 게 첫번째 감동이었다.
특히 몇 차례 같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4명의 가수(김범수, 윤도현, 이소라, 박정현)보다 새로 등장한 임재범, 김연우, BMK 등이 더 그랬다. 경쟁자들이 노래 부르는 걸 대기실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그들의 동공은 크게 열렸고, 손은 가볍게 떨렸으며, 표정은 굳어졌다.
베테랑에게서 좀처럼 찾기 힘든 신참자의 모습이었는데 그 떨림이 화면에서 튀어나와 내 몸을 휘감았다.

두번째 포인트는 1등이 꼴찌로 떨어지는 게 순간이란 것이다.
최영미 시인이 선운사에서 깨달은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이란 섭리를 노래 한 곡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참고로 최 시인의 절창은 이렇게 이어진다.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자연의 몰락은 때가 돼 무르익은 '스스로 그런' 것인 반면 인간의 그것은 자만(요즘말로는 '오버')의 결과이기 쉽다는 것.

눈가의 물기를 엉거주춤 닦아내며 베란다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다 문득 그 액자가 생각난 것이다.

이제 누군가 나에게 '너는 누구냐'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예전처럼 "나는 기자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가수다'는 매주 일요일 일상에 널브러진 나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데, 여러분은 편안하신지.

☞ 박종인의 당신과 함께 하는 충무로산책 보기



박종인 부국장 겸 금융부장 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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