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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2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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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2등은 없습니다. 2등은 바로 죽음이고 패배이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터 이상으로 냉혹합니다. 1등이 아니면 시장에서 퇴출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똑같아서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남들과 같아서도 앞설 수 없습니다. 자만하고, 도전을 미루다가는 1등의 자리, 정상의 자리는 바로 넘겨줄 수 밖에 없습니다.
새해 들어 경제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정부당국자들이 선칙제인(先則制人, 남보다 먼저 도모하면 능히 앞지를 수 있다), 일기가성(一氣呵成, 일을 단숨에 매끄럽게 해 낸다)이라는 말을 쏟아내더니 변화, 도전으로 모든 것을 바꿔보자는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모습에서 살벌함까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재계 주요 인사들의 오가는 말에서 그런 비장한 결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또 한 걸음 뒤진다. 옛날부터 앞선 회사들이 퇴보한 사례가 많았다.”(이건희 삼성회장)
“옛날 LG전자는 강하고 독했는데 그 부분이 많이 무너져 안타깝다. 1등만 산다. 2등은 없다. 독한 DNA를 가진 회사로 만들겠다.”(구본준 LG전자 부회장)

“회장님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분이다. 지고는 못 배기는 DNA를 가졌다. 지난해 실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자만하지 말고, 계속 도전하고 전진해 나가자는 게 회장님의 일관된 메시지다.”(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그렇습니다. 경제 강국, 글로벌 시장에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과거의 성공한 경험에 안주하면 미래는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계의 이 같은 모습을 지켜보니 마음이 바빠지고, 종종걸음으로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도 머물러 숨을 고를 시간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달리는 자동차속에서 뛰는 모습도 좋지만 조금은 여유를 가지며 더디게 가며, 쉼 속에서 보다 값진 보물을 찾아 낼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삶의 템포를 한 박자 늦춰 볼 수는 없을까, 1등에만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고, 1등 뒤에 가려져 있는 2등의 모습에서 새로운 가치를 끌어 낼 수는 없을까-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고나면 바뀌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과에 순응하고 기회를 얻은 사람과 놓친 사람, 1등과 2등이 서로의 포부를 교환하는 지혜 같은 것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말 숨이 가쁘게 뛰어왔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머무르며 생각의 여유를 가질 틈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뒤에 처진 사람이 앞서가는 사람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으면 비싼 코스트를 지불해서라도 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집안과 지역을 먼저 따졌고,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를 중시했습니다.

기본을 찾아 원칙을 살리기보다는 선진국의 발자국을 먼저 잘 밟기 위해 노력했고, 몸에 맞지 않더라도 부자의 신발을 재빨리 찾아 신기만하면 부자로 존경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내가 먼저 가기위해 신호를 무시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앞에 넘어진 사람을 짓밟고 넘으면서도 죄의식 같은 것은 갖지 않았습니다. 2등의 존재는 곧 바로 잊어버렸고, 1등만 존경했습니다.

“어제와 같아서는 살 수 없다.”

“궁하면 통하는 시대는 지났다. 변하면 통한다.”

“나의 경쟁자는 오직 미래의 나 자신뿐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변하고, 도전하며, 조금은 느리게 가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 좋은 말들입니다. 4가지 조건, 이것만 잘 지키면 인생에서 승자가 되는 것은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4가지 말은 어쩌면 서로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변화를 원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변화를 게을리 하면서 정상의 자리, 세계 최고를 지향할 수도 없습니다. 배려하며, 느리게 가며, 나보다 남을 존중하며 살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칫 낙오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손해 보기 십상입니다. 계산이 빠른 경쟁자가 자리를 넘보며 낚아채가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한 DNA, 남에게 지고는 살 수 없는 도전정신 없이 세계 1등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선두를 지키려면 강하고 독한 실행력과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예쁜 꽃이 가장 먼저 꺾인다 해서 튀는 것을 경계하다보면 자신의 영역을 눈깜빡할 사이에 남이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급히 먹은 음식이 체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급하다고 바늘의 허리를 매어 쓸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1등보다 아름답고 고귀한 2등도 있습니다. 느림의 미학이 광속을 능가는 빠른 변화를 리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울퉁불퉁하고 제멋대로 생긴 나무가 오랜 세월 잘리지 않고 버틴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2003년. 프랑스에서 '투루 드 세계 사이클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도로를 일주하는 경기였습니다. 이 대회는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스포츠경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이 대회의 최대 관심사는 두 사이클 영웅이었습니다. 독일의 정상을 달리고 있는 얀 율리히가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을 꺾을 수 있을까에 시선이 집중됐습니다. 랜스는 이미 이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한 경력으로 미국이 내세우는 세계적인 스타 선수였고 얀은 랜스를 넘어 독일인의 꿈을 이뤄줄 유일한 대항마로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24일 동안 1만 리를 달리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두 라이벌은 접전을 벌였습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시속 50킬로미터를 넘나드는 속도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숨 막히는 접전이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은 역시 사이클의 영웅다웠습니다. 15구간을 지날 때까지 줄곧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위를 하던 랜스 암스트롱에게 갑자기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도로가에서 응원하던 한 어린이가 주행로에 불쑥 뛰어들었고, 그는 넘어져 버렸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에게는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위를 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얀 율리히에게는 2위에만 머무르게 했던 숙적을 물리치고 1위에 올라설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게 됐습니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습니다. 계속 페달을 밟기만 하면 우승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뒤따르던 얀 율리히 선수 역시 곧바로 레이스를 중단하고 랜스 암스트롱이 일어나 다시 달리기를 기다렸습니다. 1등을 달리던 경쟁자가 다시 일어나 페달을 밟는 것을 보고서야 본인도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시작된 경주에서 두 사람을 있는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결과는 랜스 암스트롱의 승리였습니다. 얀 율리히는 또 2등에 머물렀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은 고환암에 걸려 생존가능성이 희박했지만 고환을 떼어내고, 뇌의 일부를 잘라내며 투병한 끝에 출전한 선수였습니다. 미국은 그가 투병 끝에 다시 정상에 선 그를 축하했습니다. 독일은 얀의 매너가 실종되어 가는 스포츠 정신을 살려내고 독일의 국격을 높혔다고 흥분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두 영웅의 레이스를 감동으로 지켜봤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누가 승자입니까? 누가 패자입니까?

신묘년.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살벌합니다.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로 축산농민들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으며,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가파른 전셋값의 상승, 물가불안으로 서민들의 주름살은 늘어만 갑니다. 정치권은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과연 세상의 변화를 얼마나 읽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2등은 없다’며 비장한 각오로 뛰는 기업을 보고 있는지, 1등보다 아름다운 2등을 선택한 선수가 바로 영웅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두 사이클 영웅의 감동적인 레이스를 떠올리며 2011년의 전략, 그리고 인생 설계도를 수정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 회장 pres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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