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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장 바뀐 날 그 지점에 갔다가...①

최종수정 2011.01.01 12:29 기사입력 2011.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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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 하는 충무로산책

은행장 바뀐 날 그 지점에 갔다가...①
꼭 그날, 그 은행, 그 지점에 가야했던 건 아니다.

어쩌다보니 그 은행과 주거래 관계를 맺게 됐고,(내 의지가 아니라 종전에 거래했던 은행이 지금 거래은행으로 흡수·합병됐다.) 관계를 청산하기가 쉽지 않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 거래은행을 바꾸는 건 담배를 끊거나 신문을 중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담배도 몇 차례 끊어봤고, 신문도 여러 번 바꿔봤지만 주거래은행을 교체해 본 적이 없다. 안 한 게 아니고 못했다.)

재산이 많은 것도, 거래가 복잡한 것도 아니다.
그 은행의 ‘CEO 3인방’처럼 무슨 비밀거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못할 것도 없지 싶다.
까짓것 대한민국에 안되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주거래은행 교체가 감정만으로 쉽게 결행할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 은행에 간 건 ‘저축’을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저축예금’(월급을 받고 카드를 결제하는 예컨대 이자가 거의 붙지 않는 요구불, 보통예금)에 있는 돈 가운데 300만원을 ‘연금신탁’으로 옮기려고 간 것이다.

(나중에 확인증을 보니 ‘대체’로 돼 있다. 이런 금융거래를 은행원들은 이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대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다른 것으로 대신함’으로 나와 있고, 바로 뒤에 '바꿈'으로 순화해서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달고 있다. <경제용어>로는 '대체계정, 어떤 금액을 한 계정에서 다른 계정으로 대체하는 일’로 나와 있다. 그냥 ‘바꿈’ 또는 ‘옮김’이란 한글로 바꿔 써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하긴 쉬운 말로 바꾸면 은행의 신뢰나 권위에 흠집이 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럼 최고경영진 셋이서 자리를 놓고 서로 고발하고 싸우다 횡령 혐의로 수사 받고, 결국 셋 모두 동반 퇴진한 그 은행의 그 복잡하고 치사한 상황은 신뢰와 권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왜 하필 그날, 그러니까 연말을 하루 앞둔 날, 은행에 갔느냐고 묻는 이도 있을 수 있다.

연금신탁은 연말정산 때 소득공제(세금 액수를 산정하는 기준이 되는 연간 총소득에서 일정금액을 빼준다는 의미) 대상이 되는 금융상품이다.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이쯤에서 감 잡았겠지만 소득공제 한도는 연간 300만원. 매월(또는 불특정하게) 나눠 불입하건, 아니면 연간 어느 시점을 잡아 한번에 300을 지르건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 해가 가기 전에 300만원을 반드시 납입해야 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미루다 마감을 코앞에 두고 은행을 찾은 건 순전히 내 불찰이다.
(마감시간이 임박해야 기사가 써지는 잘못된 습성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남는 의문은 하나. 왜 그 지점에 갔느냐하는 건데 설명이 좀 필요하다.

미리 답하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은행 지점은 회사 근처에 널려 있기 때문에 꼭 그 지점을 고집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혹시 ‘널려있다’의 어감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독자분이 계신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반경 1킬로미터 안에 그 은행 지점이 9개 있다면, ‘널려있다’는 표현에 수긍하시리라.

사부작사부작 걷는다 해도 그 지점 말고 다른 선택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한번 따져보자.

내가 일하고 있는 충무로 아시아미디어센터에서 도보로 10분 안에 갈 수 있는 그 은행의 지점은 청계지점, 을지로지점, 극동금융센터지점, 충무로역지점, 종로3가지점, 명동지점 등 6개에 달한다. 네이버 지도에서 검색해보면 이들 지점은 직선거리로 약 700미터 안에 있다.

점심을 소화시킬 겸 운동 삼아 더 걷고 싶다면 종로광장시장지점(약 977미터, 걸어서 15분)이나 을지로5가지점(약 879미터, 걸어서 14분)을 선택할 수도 있다.

혹 옹색한 것이 싫어 지점은 죽어도 못가겠다는 분도 있을 텐데(이를테면 은행은 모름지기 크고 삐까번쩍해야 한다고 믿는 분들. 참고로 ‘삐까번쩍’은 반짝반짝하다는 일본어 삐까삐까와 우리말 번쩍번쩍이 합쳐진 단어다.)

이런 분들은 남대문 근처에 있는 이 은행의 본점 영업부로 가면 되는데 걷기에는 좀 무리다.
직선거리로 1.96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차로는 약 7분, 대중교통으로는 20분 안팎(지하철 18분, 버스 23분) 걸린다.

그러나 본점이 아니어도 삐까번쩍하고 넓은 곳이면 무방하다 싶다면 방법은 있다.

합병돼 이름이 없어진, 그러니까 애석하게 간판을 내린, 다시 말해 내가 전에 거래하던 그 은행의 본점(지금은 ‘금융그룹’이란 간판을 걸고 있다.)이 직선거리로 951미터(걸어서 약 15분) 떨어진 광교에 있으니까 말이다.

결국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15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그 은행의 지점이 총 9개인데 하필 그 지점에 갔으니 우연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잠깐, 은행이 경쟁력을 높이려고 M&A를 한 거라면 당연히 지점수가 줄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저 많은 지점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결국 고객인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게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 지점의 따뜻한 실내로 들어서니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성큼성큼 다가와 말을 붙였다.

“연금신탁에 돈 300만원 넣으려고 왔는데요.”

나는 사실대로 말하고 나서 곧 후회했다.

뭔가 복잡한 업무를 하러 왔다고 하거나 금액이 커야 대우가 좋아진다는,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깜빡 잊은 것이다.

좀 치사하지만 내가 이 은행의 ‘프리미어 고객’이고 이 은행에 급여이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 어떨까 고민하며 머뭇거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감은 적중했다.

그 제복 청년이 냉큼 번호대기표를 하나 뽑아서 건넨다. 받아보니 역시나 일반 입출금창구의 번호표였다.

그나마 다행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반경 1킬로미터 안에 지점이 9개나 쫙 깔렸는데 기다리는 고객이 많을 리가 없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20대 초반의 창구 여직원이 서서 맞는다.

그녀가 나를 반긴다는 착각으로 기분이 금세 좋아진다.
속물근성이 작동한 것이다.

그래서 불쑥 입출금통장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연말정산 용 연금에 돈 넣으러 왔는데요. 여기 이 통장에서 인출해서, 그런데 혹 뭘 써야 하나요?”

현금을 인출해서 갖고 가는 것도 아닌데 꼭 전표를 작성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반갑게 맞았으니 이 정도는 그냥 해줄 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예, 그럼 통장 주세요.”
“어, 어떤 통장이요?”
“연금통장....”
“그 통장은 없는데....”
“.....”

표정을 보니 통장을 갖고 오기 전에는 안 해줄 기세다.

여기서 밀리면 이 추위에 그냥 돌아서야 한다는 위기감과 잘못하면 연말정산에서 소득공제를 못받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공격본능을 자극한다.

“연금통장이라, 그런 게 있었나, 가입할 때 받은 기억이 전혀 없는데.... 그 통장 없으면 입금이 안 되나요?”

연금신탁에 가입한지 5년이 지났으니 기억이 날 턱이 없다.

“.....”

“작년에 다른 지점에서 돈 넣을 때는 통장 없이 그냥 했는데요.”

이 말은 사실이다.
(직장을 충무로로 옮긴지 6개월밖에 안됐고, 전 직장 근처의 광화문지점에는 업무관계로 안면 있는 직원이 많아 업무가 수월했다.)

그렇게 몇 분을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옆에서 다른 고객을 상대하던 여직원이 끼어들었다.
(내 앞의 여직원이 “주임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선배가 분명하다.)

“그 손님이 준 일반통장으로 컴퓨터 원장을 열어보면 될 텐데...”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다.

옆 직원의 개입으로 연금신탁통장 없이 온 문제는 해결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거 적어서 신분증과 함께 주세요.”

그녀가 건넨 전표를 받아 내용을 적은 뒤 사인을 해서 건넸다.

그런데 ‘아뿔싸, 이를 어쩌지’ 지갑을 열고 아무리 찾아봐도 신분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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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본부장 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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