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무너지는 고택, 갉아먹는 흰개미…"믿음이란 무엇인가"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세종S씨어터 개관기념작 연극 '사막속의 흰개미'

'사막속의 흰개미'의 목사 '석필'(세종문화회관 제공)

'사막속의 흰개미'의 목사 '석필'(세종문화회관 제공)

AD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조목인 기자] "이 마을사람들 불행해진 것도 다 여기 때문이란 거잖아요. 어떻게 할까요, 일일이 찾아가서 사과라도 할까요? 그러면 되겠어요? 근데 어쩔수 없어요. 그거 알아요? 이 집은 그렇게 생겨먹었어요. 수많은 아버지들이 태어났을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다구요. 그래요. 그렇게 부정했지만 결국 내 핏줄이예요. 그렇게 부정했지만 나한테 다 떠넘기고 죽어버렸어요."
여기,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높은 언덕에 백년된 고택 한채가 우뚝 서있다. 이 고택의 주인은 한 대형교회의 젊은 목사 '공석필'이다.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이 집은 그 지역 최초의 교회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항상 교회를 위해 기도했고 평온을 빌어왔다. 그래서 그런지 극심한 가뭄으로 마을 전체가 메말라가는 중에서도 고택은 유일하게 무성한 수풀이 자라고 있다. 100년된 고택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신앙을, 석필에게는 아버지와 조상들에 대한 믿음을 상징한다.

100년은 더 갈 것 같았던 이 고택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천장에서는 모래가 우수수 떨어진다. 고택을 갉아먹는 흰개미들의 날갯짓 소리에 귀가 따갑다. 개미들의 서식지인 하얀 페어리 서클이 암흑속을 어지럽게 맴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고택의 몰락은 우리가 철통같이 믿고 있었던 믿음의 몰락이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개관작 '사막속의 흰개미'는 우리에게 일상이 된 신념,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믿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사막속의 흰개미'(세종문화회관 제공)

'사막속의 흰개미'(세종문화회관 제공)

원본보기 아이콘


소리소문없이 고택을 갉아먹고 있던 외래종, 흰개미들이 내부 공격자라면 목회자에게 순종했던 교인들의 반격은 외부 공격자들이다. 고택의 주인인 젊은 목사 석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임지한'에 의해 15년 전 아버지 '태식'이 저지른 죄의 비밀을 알게된다. 더구나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해온 것과 달리 지한의 기억속의 자신 역시 방조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 옆을 지킨 어머니 '현숙' 역시 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흰개미에 대한 탐구는 국제곤충 아카데미의 회원이자 입양 한국인인 '에밀리아 피셔'에 의해 다뤄진다. 석필의 고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에밀리아의 논문 발표 사례 중 하나다. 고택의 사건들과 별개로 에밀리아의 학술 논문 발표현장이 나오면서 관객들에게 흰개미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에밀리아는 고택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일종의 나레이터의 역할을 수행한다. "부모님을 찾으러 한국에 왔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찾을 이유가 없다"고 답하는 그는 입양에도, 흰개미에도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인물이다. 동시에 같은 여성으로서 아픔을 겪은 지한을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작품을 쓴 황정은 작가는 "살면서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는지, 내가 서있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서 "석필은 아버지와 다르고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지만 완전히 다르다고 믿는 순간 작은 죄가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맹목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교회라는 틀을 선택했지만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사막속의 흰개미는 '2018 서울시극단 정기공연 창작대본 공모'를 통해 선정됐다. 작품의 연출을 맡은 서울시극단 김광보 단장은 "집을 갉아먹고 있는 흰개미와 무너져가는 고택, 그 안의 불안과 위태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세종S씨어터의 무대를 블랙박스 극장에 맞게 변화시켰다"면서 "넓은 마당과 황량함을 구성하기 위해 객석을 옆으로 깔아 관객들이 극 속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도록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사막속의 흰개미는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만나볼 수 있다.




조목인 기자 cmi0724@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