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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용과 뱀이 모여 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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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 전해오는 속설 중에 불상의 얼굴이 신기하게도 그 절 주지스님을 닮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32상 80종호의 원만한 부처님 모습이 일개 주지의 얼굴을 닮는다는 말은 주지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만들어낸 말일 확률이 높지만 재미있는 것은 불상만 아니라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이다.


주지가 누구냐에 따라 절에 모이는 사람들도 비슷하다. 주지가 강하면 신도들도 억세고 주지가 별나면 신도들도 별나다. 불심 때문이라고 말하긴 어렵고, 사람뿐 아니라 사물들도 '유유상종'하며 어울리는 것이 세상 이치니 절집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가끔 내 주변 사람들이 온건하고 성실하다는 말을 들으면 말하는 사람도, 듣는 나도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남들이 하는 것을 다 해봐야 한다는 말에 설득되어 생각지도 않았던 주지 소임을 맡아 두 해를 지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말이 칭찬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그러므로 사람은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


옛날 무착문희 선사가 오대산 화엄사로 가는 길에 금강굴에 들러 한 노인을 만나 "이곳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주지합니까?"라고 묻자 노인이 "용과 뱀이 섞여 있고 범부와 성인이 동거한다"고 대답했다 한다. "대중이 몇 명이나 됩니까?" 이어지는 물음에 노인이 대답한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은 화두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사는 근대 이후도 서로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 차이라고 역설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종교마저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생각과 생활방식을 강화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몰이해와 차별을 심화시키는 기관이 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유럽에서 극우 정치세력의 재등장을 지켜보면서 다양성과 관용 같은 가치가 지켜질지 우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신의 삶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삶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화엄경에서는 평등을 부처님이 온 세상에 다 나타내지만 그 모습이 차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부처님의 목소리가 온갖 종류의 중생에게 순응한다고 이야기한다. 인종이나 국적, 종교, 성별의 차이 속에서 사람됨의 고귀함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다양성과 창조성의 원천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사는 것을 삶의 근본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상생은 불가능하다.


모 정당의 대표가 부처님오신날 사찰을 방문하여 불교예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말이 무성하다. 성철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진짜 부처님은 옆집 아저씨에게서도 부처를 보고, 어린아이에게서도 부처를 보고, 노인에게서도, 성인에게서도, 범부에게서도 부처를 보고, 교회에서도, 성당에서도 부처를 만나는 분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진짜 예수님은 절에서도 예수를 만나고, 모스크에서도 예수를 보는 분이 아닐까?


누군가 어떤 절이 좋은 절이냐고 묻는다면 예전의 나는 틀림없이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들 말이다. 주지 2년 차인 나는 다르게 대답한다. "용과 뱀이 섞여 있고 범부와 성인이 동거하는 곳"이라고.


명법 구미 화엄탑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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