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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0]옹플뢰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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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플뢰르(Honfleur)를 아시는지요. 파리의 센 강이 서쪽으로 흘러서 대서양으로 안겨 드는 곳. 거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구가 있는 마을입니다. 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포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보들레르의 시 <여행에의 권유>가 절로 떠오르지요. “보라, 저 운하에 잠자는 배들. 떠도는 것이 그들의 버릇. 저들이 세상의 끝에서 온 이유는…” 찬란한 햇빛 아래 고요히 정박해 있는 요트들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잠시 쉬는 중일 테지요. 제 눈에는 커다란 군함새가 해면에 배를 깔고 조을조을 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옹플뢰르는 포구도 아름답지만 포구 주변의 건물들이 멋집니다. 높게 올라간 집들은 폭이 좁게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옛날에 바닥 면적에 따라 세금 걷는 법이 시행되자 일부러 바닥을 좁게 만든 것이지요. 대항해시대에 들어 자금이 풍부해지자 상인들은 왕의 말을 안 듣기 시작합니다. 왕은 이웃한 곳에 항구를 다시 만듭니다. 르아브르(Le Havre)는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무역선들이 정박하고 경제가 활성화되자 옹플레르는 자연스럽게 쇠퇴합니다. 신도시가 생기자 구도시가 몰락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경제가 쇠퇴한 옹플뢰르는 20세기에 들어 관광지로 다시 부상합니다. 대항해시대의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몰락한 상권의 역설입니다. 17~18세기의 건물들이 가슴에 가슴을 붙이고 서 있는 모습은 그림 속 풍경이지요. 예쁜 화랑과 멋진 카페, 아기자기한 수공예 숍들이 늘어 선 골목길. 이런 데선 한없이 게으르고 싶어집니다. 전통 먹거리 가게에 들어가 5유로에 13개 주는 캐러멜을 삽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씹던 밀크캐러멜 생각이 나서 말이지요. 달콤한 추억이 입 안에서 놀고 있는 이 게으른 향락의 시간!


옹플뢰르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전초기지요, 대항해시대의 거점도시여서 뱃사람들이 늘 북적거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항구엔 특별한 건물이 있지요. 생트카트린 성당. 서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성당입니다. 천정 형식이 특이해서 살펴보니 큰 배를 뒤집어 씌워놓은 형상이네요. 배 밑바닥이 성당 천정이 된 경우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라고 했는데, ‘영혼을 낚는 어부들의 집’으로 이보다 안성맞춤인 건물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떠나온 파리에는 소나기가 쏟아진다는데 옹플뢰르의 날씨는 쾌청하고 부드럽습니다. 중국 동진시대의 서예가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이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았으며, 은혜로운 바람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라고 했는데, 봄날의 따스한 기분을 저는 프랑스 옹플뢰르에서 느껴봅니다. 왕희지는 이 글에서 옛사람들이 느끼던 감회가 두 개의 부절(符節)이 하나로 맞추어지듯 자기와 똑같다는 것을 노래했지요. 생사의 이치며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에 대한 느낌이 동서고금이라 해서 어찌 다르겠습니까. ‘천랑기청하고 혜풍화창하니…’, 이런 날씨가 늘 우리들 마음에 드리우면 좋지 않겠는지요. 미세먼지 없는 하늘. 미세먼지 없는 마음.

천랑기청과 혜풍화창은 미술에서는 인상파의 탄생과 관련이 깊습니다. 실내에서 인물화나 정물화를 그리는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 풍경을 캔버스 안에 잡아두려는 것이지요. 클로드 모네 같은 이가 대표적입니다. ‘빛을 사로잡으려는 화가들.’ 저는 인상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모네도 처음에는 풍경화에 관심이 없었지요. 그는 중학생이 되어 특별한 스승을 만납니다. 외젠 부댕(Eugene Boudin).


그의 고향이 바로 옹플뢰르입니다. 그는 학교 수업을 답답해하던 소년 모네에게 ‘밖에서 그리는 풍경화’라는 혁신적인 기법을 가르칩니다. 당시에도 풍경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스케치만 외부에서 하고 나머지는 실내에서 완성시키는 게 관례였지요. 그러나 부댕은 처음부터 끝까지 야외에서 풍경을 완성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부댕보다 열여섯이나 어린 모네는 부댕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화풍으로 보면 동료이기도 하지요. “모네야, 저 바다의 모습이 어떠하냐? 구름과 하늘은 또 어떠하냐? 햇빛과 물결과 바람이 순간순간 변하지 않느냐? 화가는 저 순간을 잘 표현해야 한단다.” 부댕의 창의성은 빛과 순간의 움직임을 자신의 느낌으로 사로잡으려는 것이었지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실주의 화풍과는 파격적으로 다릅니다.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모네와 달리 부댕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댕이 없는 모네는 생각하기 어렵지요.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부댕과 모네입니다. 옹플뢰르 바다에 와서 천랑기청과 혜풍화창의 느낌을 부절 맞추듯 맞추어보니, 왕희지도 제 스승이요 부댕과 모네도 인생의 또 다른 스승이군요. 하지만 청출어람은 신의 선택. 우리 같은 범재(凡才)는 부절 맞추는 일만으로도 감격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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