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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윤의 책섶] 폭력의 전이가 만든 ‘여성 혐오자’의 민낯

최종수정 2019.04.26 16:52 기사입력 2019.04.2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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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망상과 열등감으로 여성에게 상처주기를 즐겨한 남성의 ‘최후’

<산소 도둑의 일기>는 여성 혐오자이자 스스로를 '산소 도둑'이라 칭하는 남자가 고백하는 여성 혐오의 기록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산소 도둑의 일기>는 여성 혐오자이자 스스로를 '산소 도둑'이라 칭하는 남자가 고백하는 여성 혐오의 기록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육체가 아프거나 병들면 사람들은 흔히 병원을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음과 정신이 아픈 사람들은 자신의 병증을 쉽사리 인지하지 못하고, 또 인지한 이후에도 치료를 망설이기 일쑤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과정이 기록으로 남는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는 이내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의 병을 더 깊게 만들고, 이는 내재적으로 수렴되다가도, 때로는 외향적 발산으로 주변인과 사회에 표출되곤 한다. 책의 주인공이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고백하는 ‘성적 가해’의 원인 역시 뿌리 깊은 그의 마음과 정신의 병에서 기인한 것일 터. 대체 어떤 변인이 한 남자를 산소 도둑으로 만든 것일까?


화자는 줄곧 자신의 여성 혐오의 궤적을 자랑스레 전시한다. 스쳐 지난 여인들의 이름과 특징을 하나하나 거명해가며, 자신이 그들에게 안긴 정신적 상처 속을 비집고 들어가 그 순간 자신이 내뱉은 말과 상대의 반응을 소상히 재현해 낸 뒤 기어이 모두를 그 고통의 순간으로 초대한다.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화자는 그물을 던지듯 여성을 유혹한 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술의 힘을 빌려 여성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칼과 창이 아닌, 혀와 눈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여성들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은 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 준 것일 뿐”이라며 도리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그의 악행 이면에는 깊은 상처의 기억이 침잠해 있다.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로 이름 높은 아일랜드,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공회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국민적 공분을 넘어 국민 대다수가 믿는 종교마저 바꿔버린 배경에는 아일랜드 가톨릭 신부들이 수십 년에 걸쳐 자행한 아동 성범죄 스캔들이 있었다. 교구는 이미 1996년부터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문제를 알고 있었으나, 이를 개선하긴 커녕 조직적으로 은폐해 피해를 더욱 확산시켰다.


화자는 자신이 사제에게 성추행 당한 아이들 중 하나였음을 대수롭지 않게 고백한다. 그는 이 경험을 두고 “씨앗이 뿌려지긴 했다”며 “어쩌면 나는 상대방의 신뢰를 획득한 뒤에 그것을 돌연히 내던져 깨버림으로써, 어린 시절 내가 경험했던 유일한 인간관계의 양식을 계속 모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상처받은 소년은 비밀을 함구하고 앓는 중에도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지만, 무심한 아버지는 소년에게 “신경 안 쓴다”는 말로 그의 기대와 아버지란 세계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김희윤의 책섶] 폭력의 전이가 만든 ‘여성 혐오자’의 민낯

유일한 친구였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감정적 상처와, 델라살 형제회 사제로부터 당한 육체적 상처가 그가 여성을 상대로 자행하는 악행의 면죄부가 될 순 없다. 하지만 여성을 증오하는 와중에 때때로 비져나오는 분노와 적개심, 인지왜곡과 불안은 아동 성범죄 피해자들이 일관되게 보이는 후유증과 상당부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결국 치유되지 않고 외면된 상처는 소년이 어른이 된 후 사랑을 왜곡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불행을 배태하고 있던 셈이다.


자신을 사랑한 여성 중 한두 명은 자신에게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고, 이는 육체가 아닌 영혼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합법적 행위였다고 말하는 화자는 곧 자신보다 더 강력한 여인으로부터 처절하게 단죄당하지만, 그 과정은 통쾌함보단 왠지 모를 불쾌함을 선사한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폭력의 전이는 숨 쉴 가치조차 없다며 스스로를 ‘산소 도둑’이라 자학하는 화자를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만들었고, 찰나의 기쁨은 늘 가해의 순간 그 절정에만 잠시 머물 뿐 이내 긴 자책과 췌사로 얼룩진 장광설만이 그의 입과 손을 통해 남아 오늘 우리 곁으로 왔다.


미투 운동을 비롯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세계적 이슈가 된 시점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책은 사랑으로 교묘히 포장된 남성의 데이트 폭력, 가스라이팅과 성적 착취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다만, 얼마 전 폭로된 유명 연예인들의 단톡방 내 불법 촬영물 사건과 고위 공직자가 연루된 성 접대 사건 등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는 한국사회의 땅에 떨어진 젠더 감수성을 기준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보정효과에 힘입어 일견 주인공이 불쌍해지는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산소 도둑의 일기 / 익명인 지음 /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1만2800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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