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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윤의 책섶] 기형도를 알고, 읽고, 쓴 ‘젊은 詩人’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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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 88인이 써내린, 기형도를 향한 존경과 질투의 詩集 ‘어느 푸른 저녁’

스물 아홉에 세상을 떠난 시인 기형도. 그의 첫 시집은 유고 시집이 됐으나, 그를 만난 적 없는 지금의 청춘 그리고 젊은 시인은 시를 통해 그를 더욱 또렷하게 그려내고 불러낸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스물 아홉에 세상을 떠난 시인 기형도. 그의 첫 시집은 유고 시집이 됐으나, 그를 만난 적 없는 지금의 청춘 그리고 젊은 시인은 시를 통해 그를 더욱 또렷하게 그려내고 불러낸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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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만약 어느 시인이 20일간 300편의 시를 써 내렸노라 말한다면, 보통의 반응은 과장이 지나치다 핀잔주거나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냐 의심부터 했을 테지만 기형도는 달랐다. 그는 시인이 말하는 기이한 체험을 믿었을뿐더러, 그를 찾아가 인터뷰한 뒤 이를 신문 지면에 소개해 대중에게 그 시인의 이름을 아로새기는 한편, 그의 체험 위에 자신의 경험을 얹어 영감을 얻었다. 자면서도, 밥 먹으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시를 써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전유의 경험, 오직 시인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 기형도의 詩作 메모(1988.11) 중

신문기자였던 그가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는 말은 분명 거짓이다. 그는 날카로운 필치로 자신이 쓴 방송 기사가 데스크의 손질을 거쳐 나가게 되자 그 즉시 조판실로 달려가 자신이 쓴 원래 기사로 복원시켜 낼만큼 매일 쓰는 글에도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글은 곧 시뿐이었던 걸까. 나쁜 날씨, 거리의 자동차, 퇴근길의 커피, 친구와의 만남을 열거하는 문장에는 어쩐지 시를 쓰지 못한 자책이 어려있다.


시인은 시를 쓰지 못하면 스스로 죄악감에 시달린다. 김수영은 서강 언덕에서 생계를 위해 양계를 하는 동안 끊임없이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책했다. 심지어는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자조하기도 했다. (김수영의 시 ‘구름의 파수병’ 1956 중) 자존증명으로서의 시, 생업을 위해 잠시 펜을 내려놓고 사는 시인에겐 시를 쓰지 않는 시간이 곧 천형처럼 느껴졌을 터. 그래서 기형도의 세계는 그토록 극단적이고도 비극적인 세계관으로 이뤄졌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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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의 시집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빨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 단언했고, 살아서는 한 권의 시집도 못 낸 그가 죽고, 두 달 뒤에 비로소 세상에 나온 ‘입 속의 검은 잎’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를 알고, 그를 읽고, 그를 쓴 88명의 젊은 시인들은 그를 향한 존경과 질투, 부러움과 안타까움을 질료 삼아 트리뷰트 시집의 형태로 그 육체를 빚어냈다.

할 수만 있다면, 닥터 후와 함께 그의 타임머신인 타디스를 타고 1988년 11월의 기형도를 찾아가 퇴근길에 함께 커피 한 잔을 나누고 종로에서 술잔을 기울인 다음 그를 2019년 3월로 데려와 이 한 권의 시집을 그에게 건네고 싶다. 분명 펼쳐보는 그 즉시 머쓱해 하며 손사래를 치겠지만. 이 짐작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988년 3월, 기형도는 외부 필진의 원고를 뽑아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데스크를 찾는다. 그가 대뜸 데스크에 건넨 기사는 평론가 김현이 쓴 ‘시 월평’ 원고였고, 내용의 절반이 기형도의 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내가 문학 담당 기자인데 이 원고를 어떻게 싣겠느냐며, 그는 김현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은 빼고 새로 원고를 받아 주십사 데스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수줍음, 어쩌면 소심함일지 모를 그의 겸손이 자꾸만 <입 속의 검은 잎>, 그리고 <어느 푸른 저녁>을 받아든 그의 모습, 그 표정을 상상하게 만든다.


청나라 말기 대학자 왕궈웨이는 세상의 경계를 보통 사람의 것과 시인의 것 두 가지로 분류했는데, 시인의 경계는 오직 시인만이 느끼고 알아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 눈에 비친 기형도의 경계를 쉴 새 없이 오갔을 88명의 곡진한 마음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의 깊이와 불안을 감지하는 시인의 감각이 살아있음을,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오롯이 증명해내고 있다.


<어느 푸른 저녁(젊은 시인 88 트리뷰트 시집)/강성은 외 87인/문학과지성사/1만5000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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