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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희의 On Stage] 로자 아줌마는 왜 날마다 7층을 걸어오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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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자기 앞의 생'…헉~ 헉~ 숨 가쁘게 오르는 생의 계단
상처 뿐인 두 주인공의 하루하루 '인종·혈연 뛰어넘은 진짜 사랑'
佛 공쿠르상 사상 최초 두 번 수상 로맹 가리 자전적 소설 원작

연극 '자기 앞의 생'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단 제공]

연극 '자기 앞의 생'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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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연극 '자기 앞의 생'의 막이 오르면 사람은 아무도 없고 '헉~', '헉~' 가쁜 숨소리만 들린다. 주인공 로자 아줌마가 7층 계단을 올라오는 중이다. 잠시 후 뚱뚱한 로자 아줌마가 정면 문으로 등장한다. 이 연극은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가 1975년 발표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은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 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7층 계단은 로자 아줌마의 힘겨운 삶을 상징한다. 로자 아줌마는 일흔에 가까운 폴란드 태생 유대인이다. 젊은 시절 인종차별주의자인 프랑스인 남편의 신고 때문에 독일로 끌려가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프랑스 파리에서 35년간 창녀로 일하며 살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보모 일을 하고 있다. 창녀의 자식들을 돌본다. 로자는 프랑스 정부는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창녀들이 자식을 키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자신이 보모 일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항상 예닐곱 명을 돌봤지만 7층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들 정도로 나이가 들면서 이제 남은 아이는 아랍계 모하메드뿐이다. 애칭은 모모. 모모는 엄마, 아빠를 모른 채 자랐다. 엄마는 창녀, 아빠는 포주였다. 아빠는 엄마를 죽이고 정신병원에 감금됐고 모모는 세 살 때 로자에게 맡겨졌다. 연극은 상처뿐인 삶을 산 로자와 상처를 안고 태어난 모모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상을 보여준다. 모모는 "난 엄마가 하나 있잖아. 뭐 좀 그렇긴 하지만"이라며 로자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할머니와 손자, 엄마와 아들 같은 로자와 모모가 서로 위로하는 장면은 그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과 상반된 따뜻한 느낌을 준다.


"다 지난 일이야. 이젠 아무도 나한테 애를 맡기지 않겠지. 난 너무 늙고 추하니(로자)." "아줌만 추하지 않아(모모)." "나도 젊었을 땐 예뻤지. 이젠 늙어버렸어. 걷는 게 힘드니 외출도 못 하고, 만나는 사람도 없어. 난 잊힌 거야(로자)." "난 아줌마를 잊지 않아(모모)."


어떤 의미에서 꽤 무모한 연극이다. 원작 소설이 연극으로 옮기기에 어려운 곱씹어봐야 할 문장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연극의 대사는 곱씹기가 어렵다. 그래서 7층 건물을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는 시간적ㆍ정신적ㆍ체력적 여유가 있을 때 연극 보기를 권한다. 해탈한 듯 삶을 관조하는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삶에 보폭을 맞출 필요가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갈 만큼 여유가 있을 때 연극을 보면 삶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여유가 없다. 대개 가고자 하는 층수 버튼을 누른 뒤 닫힘 버튼을 누르고 숫자 올라가는 것만 쳐다본다. 요즘 엘리베이터에는 모니터가 설치돼 뉴스도 볼 수 있다. 유용한 정보지만 때로는 세상이 얼마나 빨리 돌아가고 있는지 아느냐고 질문받는 느낌이다. 엘리베이터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마천루는 바벨탑의 상장이기도 하다.

극 중 모모의 방백(무대 위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대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모는 방백을 통해 소설에서처럼 극의 화자 역할을 한다. 중요한 극의 줄거리를 얘기해 주기도 하고, 생각과 느낌을 통해 극의 흐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연극 '자기 앞의 생'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단 제공]

연극 '자기 앞의 생'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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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의 삶을 살피는 것도 극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로맹은 자전적인 소설을 많이 썼고 자기 앞의 생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열세 살 아들 디에고와 디에고를 무척 사랑한 스페인 가정부 할머니 외제니아 무노즈 라카스타를 보면서 자기 앞의 생을 썼다.


로맹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7월28일)하기 직전인 1914년 5월8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로자처럼 유대인이다. 로맹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이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로맹을 데리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에 정착했다. 제정 말기 러시아는 반유대주의가 극심했다. 극 중 로자는 말한다. "어느 나라나 인종 차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프랑스)선 차별이 좀 적었다."


자기 앞의 생은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힌다. 연극의 첫 대사는 로자 아줌마의 '밥 먹자'다. 로자 아줌마는 죽음을 앞두고 모모에게 계속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충고한다. 궁둥이로 살지 말고, 술과 마약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모모는 맹세를 뜻하는 유대어 '카이렘'을 쓰면서까지 로자 아줌마의 충고를 따르겠다고 약속한다.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소설을 쓴 로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는 예순여섯이던 1980년 12월2일 입에 권총을 물고 자살했다. 소설가로서 삶을 두 번 살았기 때문에 여한이 없어서였을까.


로맹 가리는 1956년 '하늘의 뿌리'로, 1975년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 상을 받았다. 공쿠르 상은 한 작가에 두 번 상을 주지 않는 원칙이 있다. 로맹은 자기 앞의 생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출간했고 공쿠르상 심사위원들은 로맹이 에밀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1975년 수상작을 선정했다. 로맹은 오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를 앞세워 자신이 에밀임을 철저히 숨겼다. 폴이 오촌 조카임이 드러나면서 조카의 글을 베낀다는 비난도 받았다.


로맹과 에밀이 동일 인물임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그의 자살 6개월 뒤 공개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싫증이 나 있었다. '유럽의 교육(1945)'으로 유명해진 뒤 사람들이 나의 얼굴을 만들어줬으며 나도 모르게 거기에 동의했다. 틀 속에 갇힌 삶은 편했고 안주하기만 했으면 됐지만 나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는 유서에서 비밀을 지켜준 자신의 아들, 친척과 지인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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