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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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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아그리젠토에는 신전의 계곡이 있다.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리스인이 여기에 신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세기. 가장 잘 보존돼있는 것은 콘코르디아 신전이다. 2500여년의 세월을 견디고 당당하게 서서 인간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나를 창조했으나 나는 너희들보다 오래 생존했노라고.


세 번째 이탈리아 방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느낀 감정은 지난 두 번과는 사뭇 다르다. 콜로세움과 폼페이에서 본 고대 로마도시의 번성함에 대한 경외감은 사라졌다. 이탈리아 곳곳에 숨어있는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코드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마차를 타고 행진할 때 노예가 뒤에서 월계관을 들고 속삭였다는 말이다. 너의 삶은 유한하고 덧없음을 잊지 말라는 경고이다.

시칠리아 사람들의 삶은 독특하다. 에트나 화산을 품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활화산이다. 언제 다시 대폭발해 시칠리아를 파괴할지 모른다. 지난해 7월 이후 간헐적으로 용암을 분출하며 지진을 발생시켜 12월에는 인근 카타니아 공항이 일시 폐쇄되기도 했다. 17세기 대폭발로 카타니아를 초토화시킨 역사도 있다. 시칠리아인들은 메멘토 모리를 속삭이는 노예가 없더라도 항상 죽음을 생각하는 삶을 수천 년간 영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짓고 또 짓고 성전을 짓고 또 지었다.


이탈리아에서 "새 집으로 이사 갔는데 300년 된 집이더라"는 말을 듣고 문득 생각했다. 자기의 나이보다 더 나이가 많은 집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는 어떻게 다를까. 적어도 사고의 호흡이 훨씬 길지 않을까. 하루하루 삶의 투쟁을 하더라도 생각은 더 먼 미래를 보지 않을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자만이 죽음 이후까지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팔레르모에는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막시모 극장이 있다. 영화 '대부' 3편에 나온다. 이 극장의 설계자는 지오반 바티스타 필리포 바실리다. 1875년에 건축을 시작했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 에리네스토 바실리가 22년 만인 1897년에 완공했다. 극장을 설계할 때 아마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완공하겠다는 조급함보다는 '내 인생의 건축물'을 짓겠다는 자세를 갖지 않았을까. 어디를 가건 이탈리아는 사람들에게 메멘토 모리를 일깨워 준다.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창조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메멘토 모리를 피부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내가 사는 아파트건 주변의 공공건물이건 내 나이보다 어리다. 경주에 가서 첨성대를 보지 않는 한 그렇다.


그래서인가. 한국에서는 당대의 죽음을 초월해서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20년 장기집권을 장담하는 목소리는 나와도 100년 후 한국을 디자인하는 사유는 찾아보기 어렵다.


바티칸 교황청 도서관 신관은 1587년 식스토 5세 교황에 의해서 건축됐다. 이 도서관 벽화에는 1585년 12월 교황청을 방문한 일본 사절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7년 전이다. 명치유신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다. 그때가 언젠가. 일본의 전국시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각축하던 시기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멀고 먼 교황청에 사절을 보냈다. 종교적 목적의 사절이었지만 르네상스가 꽃핀 유럽 선진 문물의 학습이 이때 이루어졌다.


벽돌공 우화가 생각난다. 한 사람은 벽돌을 쌓고 있다고 했고 한 사람은 성당을 짓고 있다 했다. 세 번째 벽돌공은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도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안다면 죽어서 어떻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강영철 한양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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