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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속에서 희미한 한 줄기 희망을 마주하는 여자의 이야기

최종수정 2019.01.12 17:10 기사입력 2019.01.1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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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리스의 자전적 소설 <어둠속의 항해>

어둠속의 항해

어둠속의 항해



20세기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도미니카 태생 영국 작가 진 리스의 소설. 어두운 심연에서의 항해 끝에 희미한 한줄기 희망을 마주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진 리스 자신이 가장 자전적이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며 ‘최고작’이라고까지 꼽은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애나 모건은 서인도제도에서 나고 자란 십대 후반 소녀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새어머니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애나는 극단의 코러스걸이 되어 눅눅한 하숙방과 추레한 극장을 전전하며 각지를 떠돌다가 월터라는 부유한 남자를 만나 한 가닥 희망을 잡는다. 사랑에 빠진 애나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하지만 월터는 이내 싫증을 내며 떠나버리고 이후 애나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한다.

진 리스의 본명은 엘라 덜린 리스 윌리엄스(Ella Gwendolyn Rees Williams)다. 영국령 도미니카(현 도미니카연방)의 수도 로조에서 웨일스 의사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계 크리올(서인도제도 흑인과 유럽계 백인의 혼혈)로 농장을 물려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홀로 영국으로 건너가 퍼스 여학교에 다니지만, 독특한 억양과 이국적 외모로 학교와 사회에서 소외당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경제적 지원마저 끊기자 코러스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일을 하며 영국 각지를 떠돌았다. 그러다 만난 한 부유하고 나이 많은 영국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에게 버림받고, 불법 낙태수술을 받다가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 느낀 이질감과 절망, 고통스런 경험 등을 노트 네 권에 기록해 <어둠속의 항해>에 고스란히 녹여낸다.

가난한, 젊은, 여성, 더구나 식민지 출신의 이방인이라는 사중의 억압이 작용하는 냉혹한 세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단지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도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야 했던 진 리스가 자신의 언어로 신랄하고 고통스럽게 토해낸 이 기록은, 개인사를 넘어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처해온 수난사이자 제국주의에 의해 박탈되어온 식민지 사람들의 목소리로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새롭게 읽히며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어둠속의 항해>에서 애나는 여자들을 끊임없이 자기검열하게 만드는 사회의 억압과 모순, 남자들의 허세와 위선을 이미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거부하지 못한 채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휩쓸리고 마는 인물이다. 그러한 점 때문에 <어둠속의 항해>는 출간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일부에서 ‘반(反)페미니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전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에 맞서 치부까지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용기 있는 발설로서 선구적인 페미니즘 소설로 인정받고 있다.
진 리스는 1966년 <광막한 싸르가소해>를 발표해 W.H.스미스 문학상과 하이네만상을 수상한다. 그밖에 단편집 <호랑이는 멋지기나 하지>(1968)와 <한잠 자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부인>(1976), 자전적 산문집 <나의 날>(1975) 등의 작품이 있다. 1978년 평생 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훈장(CBE)을 수훈했다. 카리브해와 영국 문학의 경계에 위치한 그의 작품들은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파격적인 형식실험 등 여러 측면에서 오늘날까지 활발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진 리스 지음/최선령 옮김/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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