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고종(高宗)이 1896년, 일제의 압박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한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이용됐다는 옛 덕수궁 뒷길이 최근 '고종의 길'이란 이름으로 개방됐다. 이때 지나갔다는 경복궁의 서문(西門), 영추문 역시 43년만에 개방됐다. 일제에 맞서싸우기 위해 어려운 탈출을 감행한, 구한말 약소국 군주의 고뇌가 녹아든 길처럼 설명돼있다.
결국 고종은 은밀히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군대를 청했고, 청나라 군대가 출동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병력을 전개시켰다. 이에 양국의 침략을 우려한 관군과 동학군이 전주에서 화약을 맺었고, 조선조정은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에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군이 철군을 미루다가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습격, 영추문을 돌파해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조선군의 무장해제 명령을 내릴 것을 강요한다. 이에 고종은 조선군의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고, 이로인해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기를 내려놓게 됐다.
이 와중에 청일전쟁과 뒤이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 등이 연이어 벌어졌고, 고종이 결국 경복궁을 탈출하는 아관파천이 벌어진다. 비극의 역사임은 틀림없지만,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애초에 동학군 토벌을 목적으로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고종의 잘못이 매우 큰 셈이다. 하지만 '고종의 길'은 물론 영추문에도 이러한 설명이 제대로 나와있지 않다. 고종이 일제에 항거했던 '공적' 못지 않게, 정권 유지를 위해 외국군을 끌어들인 '과오' 역시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 반드시 함께 가르쳐야 할 중요한 역사가 아닐까 싶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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