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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집으로 가는 발/권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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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출발했을 뿐 출발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 많이 걸었고 한 발짝도 걷지 않는다 걸을수록 그가 늘어난다 그 집에 가는 중에 그를 만났다 그는 아까 기침을 했고 방금 기침이 멎었다 기침하는 그와 기침하지 않는 그가 다르지 않은 만큼 다르다 아까와 방금이 그와 그 사이에 흩어진 파편을 줍는다 아까 주운 것은 멀고 방금 주운 것은 없다 아직 집은 멀었고 벌써 지났다 알지 못하는 집은 아는 집이다 집 마당에는 무화과나무 두 그루가 있다 나무는 기억나지 않고 무화과만 기억한다 무화될수록 무화되지 않는, 그가 혼자 따 먹은 것은 무화과가 아니다 때때로 다른 나무에서 다른 열매가 열린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처음 본 거리처럼 그는 그를 모르고 단지 아는, 아는 것은 보는 것의 너머에 있다 너머와 그 너머에 사라지는 거리들 몇 개의 집을 더 지나도 무화과는 흔적이 없고 흔적은 존재하지 않을수록 충만하다 그는 여전히 집에 가고 있을 뿐 아무 데도 향하지 않는다 집은 도달할 곳이 아니다 출발이 일어나지 않는,

[오후 한 詩]집으로 가는 발/권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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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 적힌 문장들은 모두 앞뒤가 이치상 어긋나 있다. 첫 문장부터 그렇다. '그는 출발했는데, 출발하지 않은 상태다'. 그리고 '그는 지나치게 많이 걸었는데, 한 발짝도 걷지 않고 있다'.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데 눈길을 좀 더 진득하니 두고 글자들을 따라가 보면 의외의 진실들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양분돼 있다. "아까와 방금"의 '그'로 말이다. "그는 아까 기침을 했고 방금 기침이 멎었다". 즉 아까 기침을 하던 그와 지금 기침이 멎은 '그'는 "다르지 않은 만큼 다르다"는 게 이 시의 주된 논리다. 그리고 이 시의 배리는 우리를 전혀 뜻하지 않은 영역으로 문득 이끈다. "무화될수록 무화되지 않는" 곳이 그곳이다. 그곳은 "보는 것의 너머"에 있으며 "존재하지 않을수록 충만"한 "흔적"들로 가득한 곳이다. 우리가 정말 도달하고 싶은 "집"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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