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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18]메트로폴 파라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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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는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게 재미입니다. 고고학(考古學)이 아닌 고현학(考現學). 옛 유물 탐구보다는 지금 여기의 현장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1930년대 서울 도심을 어슬렁거렸던 '구보씨'처럼, 이곳저곳을 관찰하는 재미 말입니다.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당대 서울 거리 묘사가 일품이죠. 순간순간을 섬세하게 관찰하는 창작 방법인데, 저는 세비야에 와서 그 흉내를 내봅니다. 중세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 건물 앞에 보따리 펴놓고 물건 파는 이들도 많습니다. 몸 전체가 새까만 밤의 종족들. 눈의 흰자위, 가지런한 치아며 서글픈 손마디 끝의 손톱들이 유난히 흰 빛입니다. 소수로 밀려난 순결한 저 빛, 슬프고 짠합니다. 위조 상표가 붙은 조악한 상품들을 펴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저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난민입니다. 유럽이 착취해간 아프리카의 후손들. 이제 유럽에 난민으로 밀려와 또 다른 식구를 이룹니다. 식민 정책의 업보가 난민 문제로 고스란히 돌아오는 거죠. 유럽의 새로운 그늘입니다.

환한 대낮에 밤의 종족들 사이를 거닐다가 문득 독특한 건축물 앞에 발이 멈춥니다. 별명 '안달루시아의 큰 버섯'. 아랍 정취가 남아 있는 세비야의 가장 현대적인 건축물. 버섯처럼, 와플처럼 생긴 메트로폴 파라솔입니다. 가장 비세비야적인 방법으로 세비야를 홍보하는 랜드마크. 재개발 지구의 유적지를 보호하면서도 시민들에게 개방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창안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 기본 콘셉트는 스페인 남부 지방의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파라솔입니다.
이 건축물의 '낯선 부조화'에 대해서라면 전문적인 건축 비평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조화가 오히려 조화로울 수 있는 문학적인 역설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파라솔은 햇볕을 가리는 기능상의 개념이지만 저는 디자인의 깊은 속을 생각해봅니다. 햇볕을 더 갈구하는 거대한 나무. 내륙 항구도시인 세비야에서 먼 바다로 가고픈 물결. 옛 것에서 새 것으로 나아가려는 자유정신! 이런 게 보입니다.

건축 과정엔 우여곡절도 많았죠. 시 당국은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버려진 광장 개발에 착수합니다. 이때 지하에서 고대 로마 유적들이 발굴되지요. 공사는 중지되고 개발 계획도 멈춥니다. 유적을 살리면서 현대적 기능과 미학을 갖춘 건물을 다시 세우기로 합니다. 건축가는 나무줄기 같은 콘크리트 기둥 6개를 세우고 그 위에 굽이치는 거대한 그늘파도를 꿈꿉니다. 4개는 직사각형 광장을 통과해 땅 속에 박히게 되고, 그중 지름 6m, 두께 40㎝의 콘크리트 코어를 가진 두 기둥만 유적지 공간 내에 뻗어내려 지하 전시공간을 확보합니다.

국제공모로 당선작을 뽑았는데 창조적인 비정형 기하학적 형태 때문에 현실적으로 시공이 어렵습니다. 공사비도 5000만유로에서 1억유로로 늘어납니다. 건축가, 구조엔지니어, 건축시공기술자, 화재예방 및 목재공학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댑니다. 핀란드산 자작나무 합판 3400개를 얇게 잘라 폴리우레탄으로 코팅한 다음 공중에 굽이치는 물결처럼 배열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판자들의 연결구조는 직물을 닮았죠. 직물은 세비야의 주력 산업이었습니다. 이러한 배열 때문에 와플처럼 보이는 메트로폴 파라솔. 장변 150m, 단변 70m, 높이 26m의 목조 건축물에 구현된 250m 길이의 공중 산책로가 마침내 도심 한복판에 마련됩니다. 착공 8년 만인 2011년입니다. 메트로폴 파라솔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가장 현대적인 건축이요 세비야의 랜드마크로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습니다.
공중 산책로 정점에 파노라마 테라스가 있습니다. 세비야 시내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이곳 전망대에서 저는 부조화의 조화를 생각합니다. 건물의 속과 밖을 뒤집어 설계한 파리의 퐁피두센터. 파리의 정체성을 손상시킨다는 온갖 비난과 질타를 감내하면서도 오늘날 파리 예술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그 건물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메트로폴 파라솔은 거대한 비정형 목조 구조물입니다. 주변의 어떤 건물도 추구하지 않는 독창적인 모양새지요. 매우 낯섭니다. 조화를 깨는 부조화. 음악의 불협화음과 같죠. 그런데 낯선 부조화가 신선한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부조화의 조화입니다. 다른 것들과 어울리지 않지만 다른 것 전체를 새롭게 끌어들이는 매력. 부조화로써 조화 만들기. 그게 시의 경지 아닌가요?
시는 언어로만 짓는 게 아닙니다. 일상의 조화에서 벗어나 부조화를 추구하고 다시 조화의 세계로 돌아오는 정신. 그 속에 시는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메트로폴 파라솔은 한 편의 시입니다. 몸 틀어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파도. 그 한 덩이 잘라 와 파라솔로 드리우는 상상력. 사람을 공중에 띄워 도심 전체를 조망케 하는 파도그늘의 용솟음 건축. 밤의 종족들 껴안아 보듬으며 햇빛과 그늘이 함께 살아갈 철학을 제공하는, 오 저토록 눈부신 그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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