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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종교의 이름으로 가져보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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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의지하고 소원하는 대상을 '신'이라고 부른다면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신은 '물신'이다. 종교를 믿는 않는 이는 물론 종교를 믿는 이에게도 그보다 강력한 신은 없다. 종교의 가장 강력한 맞수였던 계몽주의조차 물신 앞에서는 실패한 프로젝트에 불과할 정도다. 신들의 찬란한 이름도, 계몽의 냉철한 지성도, "돈이면 다 된다"는 신념 앞에서 빛바랜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는, 물신이 과거의 전능한 신들을 굴복시키고 무소불위의 신으로 등극했다는 사실보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물신을 위해 자신들이 섬겼던 신들의 이름을 기꺼이 헌납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있다. 이제 신들은 욕망을 위해, 그것도 타자의 욕망을 위해 소환되고 있다. 그들은 현대사회의 탈종교화와 재종교화의 맥락에서 겨우 살아남아 물신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그럭저럭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성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진 종교 비판은 한편으로 초월성에 대한 경험주의자의 비판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비합리적 신앙에 대한 합리주의자의 비판이었다. 애초에 '기복 신앙'이라는 조롱 섞인 이름은 온갖 비합리적, 주술적 신앙에 붙여진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후기 근대 탈종교화 시대에도 기복 신앙이 살아남았을까? 예전보다 더 강력하고 더 내밀하게 남아 있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계몽주의자들의 비판을 아직도 반복하고 있는 이른바 종교 지성의 기복 불교 비판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키우고 있다. 기복 신앙의 문제, 적어도 내가 아는 불교계에서 이뤄지는 기복 신앙의 문제는, 그 주술적이고 비합리적인 성격보다 그 물신적 성격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존과 병과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소환됐던 과거의 소박한 신들을 비난하지는 말자. 비록 그들의 전능이 주술과 비합리에 불과했을지라도. 차라리 물신 아래서 군말 없이 복무하고 있는 저 가엾은 신들에게 과거의 찬란한 영광과 위엄을 돌려주는 것이 낫겠다. 하나의 이름으로 소비되기보다 진실한 약속으로 소비될 수 있도록 말이다.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은 대표적인 현세구복 신앙의 대상이다. 여인에게는 여인의 몸으로, 바닷사람에게는 바닷사람의 모습으로, 하늘 사람에게는 하늘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구제해주는 보살이다.

신라의 고승 의상스님은 종교적 존재들에 대한 투사를 없애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이라면 그것을 없애기보다 바꾸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의상스님은 가난과 병과 죽음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풍요와 건강과 무한한 수명을 현현하는 존재인 관세음보살을 또 다른 풍요와 건강, 무한한 수명이란 덕성을 구족한 존재인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아 따르는 제자로 비춘다. 이 전환을 통해 그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풍요와 건강과 무한한 수명에 대한 욕망을 이타적인 서원으로 바꾸기를 시도했다. 잘 모르지만, 기독교에서도 종교적 인물이 욕망의 투사가 아닌 그 전환의 계기로서 투사될 수 있을 것이다.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연을 바라고 요행을 바라는 비루한 욕망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더 강력해진다. 생로병사의 진실을 바라볼 용기가 없는 어리고 약한 중생에게 종교가 줄 수 있는 구원의 약속은 의상스님이 그랬듯이 투사의 전환일 수 있다는 생각에 숱한 절망에도 작은 희망을 가져보려 한다. 명법(구미 화엄탑사 주지)

명법스님 구미 화업탑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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