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코레아노?' '예스 아이 엠' '반갑습니다.' '한국 사람이세요?' '네. 독일 살아요.' 뒤에서 걸어오던 그가 우리를 지나가면서 던진 말이 결국 같은 숙소까지 이끌게 되는군요. 콤포스텔라가 하루 남짓 남았으니 이만큼 오면 모두 지칠 대로 지치게 마련이죠. 그와 동행하는 이탈리아 남자는 손에 깁스를 하고 있습니다. 숙소 2층 침대에서 잘못 내려와 인대가 늘어났다는군요. 일행이 한 사람 더 있었는데 순례 중 장인이 타계하는 바람에 급히 되돌아 갔다네요.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나라, 폴란드 사람이랍니다. 순례길은 이렇게 우연히 만나고, 만났다가는 다시 헤어지면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결국 언젠가는 혼자 되게 마련이죠. 세상에 혼자 나와 혼자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차 대전 때 수집된 유대인 문서보관소에서 일했다는데, 그는 그 이름들 속에서 자유를 향한 열망을 얼마나 많이 보았을까요. 이름 하나하나가 자유의 불꽃이었겠지요. 처음엔 독일로 파견된 광부 출신인 줄 알았습니다. 강렬한 인상이었거든요. 깊고 컴컴한 갱도 안에서 눈빛 반짝이며 불꽃의 씨를 찾던 우리의 아버지, 삼촌, 형님들….
안나 생각이 바로 떠오릅니다. 스물여섯 스위스 여성. 커다란 덩치에 기타를 메고 걷는 삭발의 여자. 에스테야의 알베르게 마당에서 기타 치며 자작곡 들려주던 여자. 맑고 깊은, 그러나 어딘지 서글픈 목소리. 모두 박수치고 환호는 해주어도 아무도 묻지 않는 그녀의 비밀. 누군가 제 귀에 속삭입니다. 안나가 암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콧날이 시큰하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제 스물여섯 살짜리가…, 저렇게 멋진 가수가…. 안나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요. 어느 노을 아래 지친 다리를 끌고 가고 있을까요. 거리가 무슨 문제겠습니까. 시간이 더 문제인 거죠. 제가 만나는 이 남자의 시간. 거기까지. 스물여섯에서부터 일흔한 살까지. 그 시간만이라도 안나가 노래할 수 있기를…, 걸을 수 있기를….
다음 날 아침 다시 길을 떠납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연락처도 묻지 않습니다. 우연히 만나 우연히 함께한 시간만큼만 서로를 보여주고 나누어 가집니다. 오래 걸어보면 그게 지혜이고 예의라는 걸 잘 압니다. 같은 길 걸으면 별별 사람 다 만나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조용히 웃으며 들어주는 사람, 상대방이 나처럼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사람, 지적하는 사람, 참지 못하는 사람…. 그러다가 다투고 맘 상해 제각각 가는 사람들. 같은 나라 사람일수록, 친구나 가족일수록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때론 끈끈한 관계보다 그리운 관계가 좋은 법. 부부 사이도 적당히 그리운 게 윗길입니다. 나그네들끼리의 관계는 기약 없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더 자유롭고 그립습니다. 병마와 싸워 이긴 일흔한 살 이 남자. 병마와 한창 싸우는 스물여섯 그 여자. 제 맘에 오래 남아 살아가는 길 위의 자유 영혼들. 우리는 '서로 모두' 그런 나그네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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