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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10] 음식의 신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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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길의 이탈리아 사람들 밝고 시끌벅적합니다. 쾌청하고 뜨끈한 기후 때문에 그럴 거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도 지형 때문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전통 때문이다 하는 설왕설래도 있죠. 길 가는 중에 이들을 몇 번 만났는데 번번이 무언가를 먹을 때였습니다.

알베르게 주방에서 요리를 하려면 배려의 미덕을 익혀야 합니다. 한 팀이 너무 오랜 시간 주방 기구나 가열기를 쓸 순 없죠. 일행이 여섯 명쯤 되는 이탈리아 일가족이 요리를 할 때면 다른 팀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자기네들은 마지막에 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요. 6인용 스파게티를 만들려면 깊고 큰 냄비에 물을 많이 잡아야 합니다. 물 끓이는 데만 20분 정도 걸리죠. 요리는 서열 2위쯤 돼 보이는 남자가 합니다. 서열 1위는 나이도 지긋하고 영화배우 앤서니 퀸처럼 생겨서 점잖게 앉아 있습니다. 젊은 여인은 홍일점입니다. 서열 1위 옆에서 살갑게 굽니다. 나머지 남자들은 개의치 않습니다.
이들 중 눈이 부리부리하고 키가 훤칠한, 의적 쾌걸 조로처럼 생긴 사내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합니다. 보타 데 비노(Bota de vinoㆍ술 가죽 주머니)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거기 담긴 포도주를 내리쏘아 마십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공중에서 누는 한 줄기 오줌폭포 같네요. 돌아가며 너도나도 해봅니다. 저녁 식당은 금세 세계인의 축제장소로 변합니다.

모계는 인도네시아, 부계는 캐나다라는 마야도 도전해봅니다. 그녀는 이십대 힘 좋은 청춘인데 헬스 트레이너라고 하네요. 배꼽이 드러나는 검은 탱크 톱을 즐겨 입고, 발가락 양말에 발가락 신발을 신습니다. 세상에! 발가락 달린 신발도 다 있습니다. 신들의 사신(使臣)이자 여행자들의 수호자인 헤르메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처럼 가벼워 보입니다. 마야가 실수 없이 폭포수 포도주를 마시자 환호가 이어집니다. 그녀는 제 흥에 겨워 춤까지 춥니다. 서열 1위 옆에서 살갑게 굴던 여인도 수줍게 몸을 흔들어 봅니다. 여신과 여왕이 어디 따로 있을까요. '여왕의 다리'라는 뜻을 가진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 지친 몸을 깃들인 날입니다.

태성이는 혼자 왔지만 알베르게에서 외국 친구들을 많이 사귑니다. 오늘 저녁은 한국 비빔밥을 대접하겠다며 준비에 바쁩니다. 그동안 몇 번 식사 신세를 진 모양입니다. 비빔밥 요리가 영 서툽니다. 재료가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거죠. 결정적인 건 참기름과 고추장이 없다는 현실. 스페인 쌀의 어설픈 찰기, 구운 돼지 목살, 계란 스크램블과 호박 양파 볶음, 그리고 상추가 들어갔네요. 참 희한한 얼렁뚱땅 비빔밥 조금 얻어먹어 봅니다. 늦은 밤에 말이죠. 그래도 청춘들은 아침 종달새 새끼들처럼 낄낄거리며 즐거워합니다. 신들의 만찬 못지않습니다.
서열 1위가 직접 요리할 때도 있네요. 에스테야(Estella)의 알베르게였습니다. 1위가 주방장, 2위가 보조입니다. 스파게티는 잘하는 줄 짐작하지만 오늘은 달걀 오믈렛이 일품입니다. 식당에 있는 한국 여인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1위는 그녀들에게 시식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는 요청에 따라 기념사진도 찍습니다. 여인들은 마치앤서니 퀸과 기념사진 찍는 것처럼 좋아합니다. 그 속에 아내도 있네요. 덩치 큰 남자 옆구리에 붙어 해맑게 웃고 있습니다. 1위의 살가운 여인도 멀찍이서 신난 갈매기처럼 끼루룩거립니다.

'당신은 젊고 예쁜 부인이 있어서 좋겠습니다.' 누군가 말하자 1위가 웃으며 말합니다. '내 딸이죠. 오늘은 딸 생일이어서 직접 요리해주고 싶었습니다.' 인자한 쾌남인데 목소리까지 성악가를 닮았습니다. 말 많이 하지 않아도 압니다. 느낌만으로도 1위는 벌써 신이 깃든 착한 영혼입니다.

한 번은 길에서 이들을 또 만납니다. 길가에 앉아 점심을 먹으려나 봅니다. 서열 2위가 길옆 풀숲에서 무언가 찾습니다. 고르고 골라 풀을 뜯다가 제게도 하나 주면서 먹어보라 합니다. 자기네는 이걸 샌드위치에 넣을 거라 말합니다. 30㎝ 정도 길이의 연한 풀이네요. 씹어 보니 아삭거리면서 알싸한 향이 납니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맛. 이름을 물어보니 피노키오 발음 비슷합니다. 이태리어로 'Finocchio'라 쓰네요.

알고 보니 서열 2위는 1위의 동생입니다. 놀라워요. 길옆에 이렇게 맛있는 풀이 있다니! 여기는 당신네 나라도 아닌데 어떻게 제철 풀을 아시는 거죠? 풀빛 바지 위에 주황색 티셔츠 헐렁하게 걸쳐 입은 2위가 말합니다. '난 이탈리아 요리사예요.' 기적이 일어나나 봅니다. 디오니소스 옆에서 축제를 거들던 신이 인간세계로 슬쩍 산책 나온 것 같습니다. '난 음식의 신이죠'라고 들립니다. 재료를 날것으로만 먹어도 행복해지는 요술. 갑자기 뱃속의 풀빛이 따스한 오렌지 빛으로 변하네요. 사람도 이렇게 신이 된다는 걸 느낍니다. 이 다정다감한 음식의 신들 앞에서. 추석 명절 잘 보내세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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