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계획따라 퇴거 절차 밟고 있지만
보상금 미지급·대체 영업지조차 없는 '대안없는 퇴거'
우주비행사 이소연 '얼굴 등고선 촬영기' 제작한 신진정밀도 "불황에 명절도 없다"
서울시·중구 등 대체 영업지 선정 나섰지만 지지부진
시행사는 애꿎은 세입자에 영업손실 민사소송 제기
[아시아경제 정동훈 기자, 이은결 기자] "새벽에도 기계소리로 시끄럽던 거리가 요즘은 해만 지면 폐허로 변하고 있다"
을지로 공구거리(청계천 산업용재 시장)는 세운상가를 끼고 청계2ㆍ4가 사이에 위치해 있다. 점포는 약 530여 곳에 달한다. 컴프레셔(압축기)ㆍ밀링머신(절삭기계) 등의 기계 제작 점포부터 산업용 기계 및 공구, 건자재 등을 파는 매장등이 즐비하다. 노가리골목이 수 많은 사람들이 노맥(노가리+맥주)을 즐기는 진풍경이 벌어지지만 공구거리는 살(殺)풍경이었다.
김영남 신진정밀 대표는 "2~3년 전까지만 해도 한두달치 일거리는 걱정도 않았는데 이제는 불황에 명절도 없다"고 한숨을 토했다. 이 곳은 우주비행사 이소연 씨의 '얼굴 등고선 촬영기'를 제작할 정도로 정밀기계 업계에서 알려졌다. 17살에 상경해 인쇄회사에서 기계를 다루다 입정동에 가게를 꾸린 지 40년. 김 대표는 현재 아들과 2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던 곳이 지금은 해가 지면 폐허 마냥 조용히 쉬는 도시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공구거리에서 만난 상인들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추석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지난 2006년 서울시가 이 일대 지역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설정하며 재개발을 시작한 이후 지지부진하던 사업이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다. 오는 2023년까지 해당부지에는 26층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선다. 보상과 대체 영업공간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울시와 중구, 시행사 등이 재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 인근 상인들은 '청계천상권수호대책위원회'를 조직해 반발하고 있다.
유락희 청계천상권수호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청계천은 1960년대부터 공구 판매를 시작한 공구 메카로 성장했다"라면서 "이 상권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문화유산인 특화거리로 지정, 보호해서 함께 상생할 지역으로 만들어 달라"라고 호소했다. 그는 "각종 자재와 제작 점포가 얽히고설켜 협업 생태계를 구축한 이곳은 공동운명체"라며 "뿔뿔히 흩어지게 만들면 제 2의 용산사태마저 우려된다"라고 말했다.
김영남 대표도 "산림동, 문래동 철공소 골목으로 옮겨간 사람도 있지만 내일 모레 일흔을 앞두고 사업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 많은 짐과 오랜 거래처와의 왕래는 어찌 하나. 새로운 사업장을 장만하는 데 드는 비용을 견디지 못해 도산할 것이 뻔하다"고 탄식했다.
서울시와 중구청은 세운3-1 등에 공구 백화점 형태로 상점을 만들어 기존 공구거리 세입자들을 입주시킬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 시행사와 의견이 달라 협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시행사는 오히려 공구거리 세입자들에게 퇴거하지 않아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게 됐다며 부당이득반환금 등의 명목으로 수억원대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유 위원장은 "이미 수십 군데의 점포에서 이런 소장을 받아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며 "영세 점포들은 수백만원에 이르는 변호사 수임료에 벌벌떨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 숱하게 나올지도 모른다…"라며 말 끝을 흐렸다.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이은결 기자 le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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