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950년대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숨진 알제리인의 죽음에 대해 프랑스군의 고문과 살해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피해자 자택을 직접 방문해 사죄했다. 서구 열강의 지도자가 직접 과거 아프리카 식민통치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범죄와 학살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프랑스 내부에서는 극우 정파를 중심으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범죄 외에 19세기 이후 자행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제대로 사죄하고 있지 않는 영국이나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열강국들의 과거청산 문제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를 침공해 북부일대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한 이래로 100여년에 걸쳐 서북 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했고, 1936년 오늘날 알제리 영토 전역을 식민지화했다. 알제리에서는 지역별로 프랑스군에 대한 항전이 이어지다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다. 이때 프랑스군은 5000여명에 이르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12세 소년 사르 알 부지드가 사망하면서 알제리 독립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이 사건을 '알제리 학살사건'이라고 부른다.
8년간 지속된 전쟁에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프랑스군의 대학살은 전 세계적인 비난에 직면했다. 냉전이 한참 진행되는 상황에서 소련과 공산권 일대에서 알제리 독립운동에 개입, 아프리카에 발판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미국이 프랑스에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내에서도 전쟁이 장기화되며 사상자가 9만명을 넘어섰고, 때마침 재개된 베트남 전쟁과 함께 전선이 2개로 늘어나면서 프랑스 여론은 점점 악화됐다. 좌, 우익간 분열 속에 프랑스 정국이 매우 혼란해진 틈을 타서 프랑스의 제4공화국이 붕괴되고 1958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드골이 다시 대통령이 됐다. 드골 대통령은 알제리 문제에서 발을 빼고 싶어했고, 1961년 알제리 측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알제리는 완전히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됐다.
하지만 이 알제리 전쟁에서 발생한 프랑스의 전쟁범죄는 프랑스 국내에서 언급 자체가 매우 금기시돼왔다. 실종처리됐던 오댕의 죽음 역시 2014년에야 투옥 중 숨진 것만 인정됐으며, 프랑스군의 고문이나 학살 등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해 2월 알제리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학살이 반인도주의적 범죄였으며 사죄해야한다고 밝혔을 때도 프랑스 내에서 엄청난 비판 여론이 일었다.
침략 188년만에 이뤄진 마크롱 대통령의 사죄가 과거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대규모 학살전을 벌였던 다른 열강국들의 태도변화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은 물론 2차 대전 당시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도 세계대전 당시 발생한 전쟁범죄는 인정하지만, 그보다 앞서 침략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식민지 주민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사죄를 한 적이 없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역사왜곡까지 불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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