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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쪽박'만은 깨지 말라

최종수정 2018.09.13 14:42 기사입력 2018.09.1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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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쪽박'만은 깨지 말라
수도권 신도시에 산다. 서울 강북에서 떨려나듯 이사 온 지 20년이 조금 넘었다. 그래도 신도시에서의 삶은 퍽 만족스럽다. 공기는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고, 집만 나서면 곳곳에 나무가 제법 무성한 공원이 있고, 도서관은 걸어갈 만하며 공연장·종합병원 등 생활 편의시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그러니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발언에 일면 수긍한다. 그는 지난 5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모든 국민들이 강남 가서 살려고 하는 건 아니다. 살아야 될 이유도 없고 거기에 삶의 터전이 있지도 않기 때문”이라 말했다. 맞다. 비록 서울 강남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듣자니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선 장 실장의 말에 토 달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어진 장 실장의 말, “저도 거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란 대목을 접하고는 울컥했다. 그는 과연 너도나도 강남에 깃들고 싶어 하는 민심이 단순히 ‘삶의 질’ 때문이라 여기는 걸까, 한 나라의 정책을 책임지는 이로써 과연 세태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여겨져서였다.

21세기 한국에서 ‘강남 주민’이란 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장 실장은 모를까. 자식의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될까 싶어 소형 아파트에 전세를 살지라도 강남 입성을 도모하는 보통 부모의 심정은? 무엇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강남 아파트 값에 서민들이 느끼는 박탈감을 장 실장은 상상도 못하는 걸까.

자유한국당이 12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장 실장이 사는 송파구 아파트의 시세가 일 년 사이 4억 원 넘게 올랐다. 이 정도 금액이면 신도시의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값이다. 강남에 ‘똘똘한 집 한 채’ 마련하면 보통 월급쟁이가 평생에 걸쳐 모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돈을 단시간에 벌 수 있는 마당에 ‘강남에 살 이유가 없다’는 투의 말이 가당한가. 그것도 현재 강남에 사는 이가.
당연히 장 실장의 발언을 두고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지”했다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의 발언이 꺼내지고 인터넷에선 “내가 소고기 먹어보니 모든 사람이 소고기를 먹을 필요는 없더라”는 등의 패러디가 떠돌았단다. 장 실장의 사촌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저서를 빌어 “(뒷사람은 올라오지 말라는) 사다리 걷어차기”란 비판도 제기됐다. 맞다. 장 실장의 발언은 좋게 봐도 물정 모르는 천진한 발언이고 심하게 보자면 ‘나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놀부 심보다.

리더가 경계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선의 또는 도덕성만으로는 나서서는 곤란하다. 일을 망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만 옳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주변 의견을 무시하다 아예 방향을 잘못 잡을 위험이 있어서다. 여기에 ‘입방정’이 더해지면 상황은 최악이다. 불신과 실망을 넘어 ‘조롱거리’가 되고 나면 영이 먹힐 리가 없으니 말이다.

지난 3월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과 행정부의 차관급 이상 공직자 206명 가운데 강남·서초·송파, 이른바 ‘강남 3구’에 집을 갖고 있는 이는 65명(32%)에 달했다. 이들이 모두 강남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아닐 것이다. 내몰려서 강남으로 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장 실장의 발언은 강남 입성을 꿈꾸거나 부러워하는 보통사람들을 무능하거나 바보로 여기는 듯한 발언이다. 왜 강남이 핫이슈가 됐는지 성찰하고 강남 집값을 잡을 실효성 있는 대책을 진지하게 고민한 뒤에야 그것도 본인을 비롯한 많은 고위 공직자들 상당수가 강남을 떠나 강북이나 신도시에 살면서 했어야 그나마 설득력이 있을 터였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우리 옛말이 있다. 이제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보통사람의 힘을 빼는 말만 삼갔으면 좋겠다. 부디 ‘쪽박’만은 깨지 마시라.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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