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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거꾸로 돈 사법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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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은 권위와 신뢰를 타고나지 않았다. 초대(1789년) 대법원장 존 제이는 고작(?) 뉴욕 주지사가 되려고 대법원장직을 중간에 때려치우더니 존 애덤스 대통령이 자기를 대법원장으로 재차 지명하자 "대법원은 에너지도, 무게도, 권위도 없다"고 일갈한 일화로 유명하다. 연방대법원은 관념이나 관습에 의지해 정치기득권을 떠받치는 일이 잦았다. 지금 보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 흑인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는 1856년 판결이 일례다. 이 판결은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제도적이고 최종적인 갈등의 조정자 역할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연방대법원이 권위와 신뢰를 획득한 건 기득권 논리를 타파하는 각종 개혁판결을 통해 정치로부터 독립하고 정치권력을 과감하게 배반하는 노력 덕분이었다. 얼 워런이 연방대법원을 이끈 '워런 법원' 시기(1953∼1969)는 이런 노력으로 특히 빛났다. 기존의 법리를 뒤집어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되 평등'이라고 규정한 판결, 선거구 사이의 인구 불평등은 위헌이라는 판결, '미란다 원칙' 등 피의자의 인권을 강화한 판결, 명예훼손의 입증을 까다롭게 해 표현의자유를 폭넓게 보장한 판결 등은 오늘날 미국을 넘어 세계 시민이 지향하는 보편가치다. 하나같이 정부나 공권력이 껄끄러워했을 판결이다. '워런 법원'은 이렇듯 사법적극주의를 앞세워 정부를 견제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얼 워런을 연방대법원장으로 기용한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훗날 한탄했다.
1974년 연방대법원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향해 워터게이트 비밀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침실에서 보좌관의 전갈을 받은 닉슨은 "만장일치였느냐,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전혀 없느냐"고 물었고 보좌관은 "만장일치였고, (결정의 논리에) 빈틈이 하나도 없다"고 답했다. 닉슨은 그로부터 17일 뒤에 스스로 물러났다. 워터게이트 특종 기자인 밥 우드워드와 스콧 암스트롱은 이런 이야기를 담은 책 '지혜의 아홉기둥'에서 "(닉슨은) 적어도 반대의견 하나 정도는 있을 것으로 믿었다"면서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길 바랐다"고 말했다. 대법관 9명 중 대법원장을 포함한 4명은 닉슨이 임명한 이들이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사건은 사법부가 권위와 신뢰를 확보하는 원리를 스스로 짓밟고 권부와 은밀하게 접선함으로써 우리 사법사(史)의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는 점에서 뼈아프다. 급기야 헌법재판소에 파견보낸 판사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한 재판관들의 토론 내용 등 내부 정보를 빼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최고법원'의 위상을 지킬 목적으로 헌재를 견제하려 했다는 추측이 뒤따른다. 사실이라면 일개 이익단체나 사기업만도 못했다는 얘기다. "오랜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룩한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루어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퇴임식에서 남긴 말이다.

대법원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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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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