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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적극적 저항 없으면 무죄?…피해자 중심 ‘안희정법’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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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안 전 지사는 이날 무죄를 선고받았다. /문호남 기자 munonam@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안 전 지사는 이날 무죄를 선고받았다. /문호남 기자 muno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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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안희정(53) 전 충남도지사가 위력으로 비서 김지은(34·여) 씨에게 성폭력을 가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가운데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무죄의 근거로 김씨가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이 근거인 ‘여성의 적극적인 저항’ 기준에 있다. 여성이 성폭행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강간죄 성립’이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런 이유로 안 전 지사의 혐의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강제추행 5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등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처럼 피해자가 성폭행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아 가해자의 행위를 강간으로 볼 수 없는 판결은 과거에도 있었다. 지난 2005년 3월 한 고등법원 재판부는 “피해 여성이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 성관계했더라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면 준강간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필름이 끊어진 걸 이용해 A 씨가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이 B씨(여)가 술 취한 상태를 이용해 성관계를 가졌다고 확실히 단정하기 어렵다”며 1심 판결을 확정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고소인이 술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 A 씨와 성관계 요구에 응했거나 적극 저항하지 않자 피고인이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성관계를 가진 것 같다”며 무죄로 판결, ‘만취상태였지만 동의한 줄 알았다’는 가해자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문호남 기자 munonam@

서울중앙지방법원 /문호남 기자 muno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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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행 적극적 저항 없으면 무조건 무죄?…1970년 대법원은 유죄로 판단

관련해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판결에서도 이 같은 논리는 곳곳에서 보인다. 안 전 지사가 김 씨에게 소위 ‘씻고 오라’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은 것, 피해자의 심리 상태가 성폭행 피해자답지 않은 것 등이다.

재판부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이뤄진 강제추행 사건에서는 안 전 지사가 피해자에게 ‘씻고 오라’고 말해 그 의미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음에도 피해자가 (성관계에) 응했다”며 사실상 김 씨가 안 전 지사의 성폭력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거절을 하지 않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어 “이른바 ‘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 상대방이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관계로 나아간 경우,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이나 ‘예스 민스 예스 룰(Yes Means Yes rule 상대방의 적극적 성관계 동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이를 강간으로 처 벌하는 체계)’이 입법화되지 않은 현행 우리 성폭력범죄 처벌 법제 하에서는 안 전 지사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김 씨가 거절이 아닌 동의 할 수 밖에 없는 배경에 대해서도 부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심리상태와 관련해 이른바 ‘그루밍’ 상태인지 아닌지, 학습된 무기력 상태는 아닌지 등을 신중히 살펴봤으나 제반 증거나 상황을 고려할 때 피해자가 이런 상황에 빠져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판단의 근거를 우리 법 처벌체계의 한계로 돌렸다. 재판부는 “이와 같은 처벌체계 도입 여부는 입법론적 문제이고, 사회 전반의 성문화와 성인식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고 언급했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14일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안 전 지사 1심 무죄 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14일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안 전 지사 1심 무죄 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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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유사 재판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바 있어 재판부가 판결의 이유 일부를 입법론적 문제로 돌리는 것은 성폭력 범죄 몰이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앞서 지난 1976년 대법원은 이 같은 위력에 의한 간음 인정으로 가해자의 고의성을 인정한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은 미장원을 운영하는 남성이 여성 종업원에게 저녁을 사준다는 구실로 함께 나와 시간을 보낸 뒤 야간통행금지로 인해 피해 여성을 유인, 함께 투숙해 성관계를 한 남성에 대해 피해여성이 스스로의 승낙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대법원 1976. 2. 10. 선고, 74도1519, 판결)

이후 대법원은 지난 2016년 위력으로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도로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위력에 해당하는지는 범행의 일시, 장소, 범인 측의 동기, 목적, 인원수, 업무의 종류, 피해자의 지위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그 기준을 제시했다.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안 전 지사는 이날 무죄를 선고받았다. /문호남 기자 munonam@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안 전 지사는 이날 무죄를 선고받았다. /문호남 기자 muno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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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영국, 독일 등 위력 여부 관계 없이 피해자의 성관계 동의 중심 주의


하지만 국제적으로 이른바 ‘노 민스 노 룰’, ‘예스 민스 예스 룰’은 합리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다. 미국의 경우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성폭행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뉴욕주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은 경우, 18세 이상 성인이 15세 미만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은 경우 등을 ‘성폭행’으로 규정해 처벌하고 있다. 가해자의 폭행·협박에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어도 성폭행이 성립되는 셈이다.

독일의 경우 한국의 성폭력 거절 기준에서 소극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몸짓이나 말로써 “싫다”고 표현했을 때 성폭력을 가했다면 성폭행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앞서 독일은 2016년 쾰른에서 발생한 집단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여론이 들끓자 법을 개정했다. 신체나 생명의 위협을 줄 정도로 협박을 가한 상태에서 성적 행위를 강요하면 1년 이상, 피해자를 현저히 능욕하는 유사 성행위를 강요하면 2년 이상, 무기를 소지한 상태에서 성적 행위를 강요하면 3년 이상의 구금형에 처한다.

영국은 피해자의 ‘명백한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성폭행 여부를 판단한다. 성적 행위에 앞서 상대방에게 분명한 동의를 받았다는 증거를 재판부에 제출하지 못하면, 폭행·협박이 전혀 없더라도 성폭행으로 처벌한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는 가해자가 피해자와 ‘합의’ 없이 성관계를 했다면 성폭행으로 판단하고 있다. 앞서 캐나다 법원은 2016년 데이트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무스타파 우루야 사건에서 성폭행의 기준으로 ‘적극적 합의’를 제시했다.

당시 재판부는 “성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이고, 의식적이며, 자발적인 동의이며, 침묵이나 저항 없음을 동의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스위스의 경우 성관계 중 남성이 여성의 동이 없이 콘돔을 착용안하면 강간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스위스 로잔의 연방 대법원은 성관계 도중 ‘상대방의 동의’ 없이 콘돔을 뺀 남자의 강간 혐의를 ‘유죄’로 인정, 집행유예 12개월을 선고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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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울면서 거부해도 강간죄 요건 충족 못 해 …관련 개정안은 국회 계류 중

반면 한국의 경우 강간을 당해도 현행법상 강간죄로 처벌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성폭행 피해 사례 중 절반 정도는 현행법상 강간죄로 처벌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3월 발표한 ‘2017 상담통계 및 상담 동향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이곳에서 상담 받은 성인 강간 피해자 124건 중 최협의설에 따른 강간죄 요건을 충족한 경우는 12.1%(15건)였다.

‘최협의설’이란 가해자의 폭행과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간죄 요건을 충족시킨 이 15건은 가해자가 심각한 수준의 폭행·협박을 했거나 피해자가 강하게 저항 또는 도망친 경우다.

단순히 울면서 거부하거나 거절 의사만 표시해 강간죄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사례는 43.5%(54건)였다. 나머지 55건(44.3%)은 상담 내용만으로 판정하기 힘든 경우였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최근 최협의설을 벗어나 당시 상황과 피해자·가해자 관계를 고려해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이유를 판단하고 있는 판결이 많아지고 있다”면서도 “비동의간음죄 신설 등 더 적극적·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 같은 상황을 개선하고자 국회에는 관련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아직 계류 중이다. 법안을 보면 강압이 없었더라도 거부 의사를 밝혔다면 모두 성폭력으로 처벌한다. 하지만 지난 3월 발의된 이 형법 개정안은 5개월이 되도록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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