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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절제된 기싸움의 연속, 촬영 때마다 정신 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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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의 리명운役 이성민

배우 이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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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쉽지 않은 인물인 것 같습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내적으로 아주 강인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영화 '공작'에서 대북사업가로 위장한 국가안전기획부요원 박석영(황정민)은 베이징 주재 북한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을 이 같이 설명한다. 중국에서 북한의 외화벌이를 책임지는 대외경제위원회 처장. 겉모습만으로 성격이 어느 정도 짐작된다. 목에 있는 단추까지 끼운 단정한 인민복. 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빗어 넘겨 이마도 반듯하다. 얼굴은 금테를 두른 안경을 써 날카로워 보인다. 큼지막한 알의 겉면에 누르스름한 색이 코팅돼 눈 모양은 제대로 알 수 없다. 속내를 감춘 채 상대의 가슴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하다.
정곡을 찌르는 무기는 선명한 눈동자와 말. 기 싸움이라도 하듯 박석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직설적이면서 도도한 변설로 조금의 착오도 없는 정론을 내세운다. "군에서 추방당한 뒤 사업을 한다는 거, 당에서 그런 사람을 믿기 쉽지 않을 것이오." 엷고 표독스러워 보이는 입술에 번지는 알 수 없는 미소. 보편적인 중년의 얼굴로 진솔한 감정을 토해내던 이성민(50)의 또 다른 얼굴이다.

영화 '공작' 스틸 컷

영화 '공작'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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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어려운 도전이었다. 통속적 요소가 배제된 스토리라인 위에서 미니멀리즘(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 연기를 구사해야 했다. 감정을 억제하면서 극에 긴장을 부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성민은 "대사를 하면서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매 촬영마다 정신이 혼미했어요. 박성영과 평온하게 마주앉은 것 같은 신에서도 칼싸움보다 치열한 공방이 묻어나야 했거든요. 박석영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이야기를 꺼내는데,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긴장이 뚝 끊기겠더라고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밤새 표정과 대사를 연습했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자괴감이 들었어요.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이성민은 이 신에서 딱 한 번 숨을 고른다. 의자에 기대던 상체를 책상 앞으로 당겨 조금 기울인다. 협상을 주도하고 싶은 마음과 다급함이 동시에 엿보이는 동작으로, 냉정한 기류 속에서 살짝 진심이 드러난다. 박성영과의 관계가 특별해질 수 있다는 암시다. 그는 "꼼꼼하게 감정을 분석하면서 겨우 숨 쉴 여지를 마련했다"면서 "1990년대 초반 대구에서 연극을 시작했을 때가 많이 생각났다"고 했다. "전형적인 연기에 익숙해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어요. 밥벌이를 한답시고 그동안 편한 연기만 했더라고요. 처음 연기할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단순한 표현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선배들에게 야단맞아가며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어요. 어떤 타이밍에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돌릴 지까지 계산하고 무대에 올랐죠. 리명운은 아주 오랜만에 그런 계산으로 만들어낸 배역이에요. 초심을 회복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뜻 깊어요."

영화 '공작' 스틸 컷

영화 '공작'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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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귀한 경험은 배우의 노력만으로 얻어질 수 없다. 연출자의 대담한 선택과 구체적인 주문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성민에게 윤종빈(39) 감독은 은인이다. '군도:민란의 시대(2014년)'에서 민초를 이끄는 대호를 그린 것도 그의 과감한 섭외와 집요한 요구가 있기에 가능했다. "대호를 연기해달라는 제안에 의아했죠. 충무로에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들이 많잖아요. 스스로도 그런 면이 없다고 생각해온 제게서 어떤 가능성을 본 건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런데 끊임없는 주문 끝에 결국 새로운 얼굴을 유도해내더라고요. 배우가 정해진 이미지에 기대어 먹고사는 직업이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줬죠. 또 다른 저의 능력도 자각하게 해줬고요."

리명운이 친근한 중년 배역과의 이별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이성민은 드라마 '미생(2014년)'에 나오는 오상식처럼 자신과 닮은 배역이 겪는 극적인 이야기에 여전히 관심이 많다. 일상에서 부지기수로 마주쳤을 듯한 편안한 인상으로 많은 관객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 관객이 이 얼굴을 아무런 이물감이나 거리감 없이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역시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죠.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집에서 자주 늘어져 있죠(웃음). 남들처럼 아내가 무서워서 청소하고 빨래도 해요.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은 저를 배우로 보지 않아요. 동네 주민들도 알아보지 못하죠. 생각해보니 섭섭한데요(웃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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