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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러일전쟁에서 장렬히 산화한 전함, '돈스코이'를 아시나요

최종수정 2018.08.07 14:46 기사입력 2018.08.07 14:36

격렬한 전투 끝, 장렬히 자침된 '전함'
보물 유무 떠나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해군의 귀감

1883년 진수돼 1885년 취역했던 제정러시아의 장갑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의 취역당시 모습. 배수량 6000톤급 함선으로 범선이 증기선으로 교체되는 시점에 취역해 돛대가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다.(사진=위키피디아)
1883년 진수돼 1885년 취역했던 제정러시아의 장갑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의 취역당시 모습. 배수량 6000톤급 함선으로 범선이 증기선으로 교체되는 시점에 취역해 돛대가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다.(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1905년 5월29일,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울릉도 앞바다에서 장렬하게 자침된 전함이 한 척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영웅적 항전과 나포를 막기 위한 장렬한 최후로 러시아 해군의 귀감으로 여겨지는 이 배의 이름은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i Donskoi)'. 원래 돈스코이란 이름은 1380년, 당시 러시아를 강압적로 지배하던 몽골족에 대항해 독립투쟁을 벌였던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돈스코이(Dmitrii Ivanovich Donskoi)'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러시아 해군사에 길이 남을 이 배가 뜬금없이 21세기 한국 주식시장을 뒤흔든 투기요소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 배와 얽힌 오래된 전설 때문이었다. 돈스코이함이 사실 전함이 아닌 보물선이라는 것. 러일전쟁 당시 발틱함대의 회계함선이었던 나히모프(Nakhimov)함에서 상당량의 금화를 옮겨실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러일전쟁 직후부터 이 함선에 수많은 보물이 선적돼있을 것이란 확인되지 않는 믿음이 생겨났다.

특히 한국에서 이 믿음이 더 강해졌던 이유는 울릉도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러시아 병사가 준 보물 이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러일전쟁 당시 돈스코이호는 일본군의 나포를 막기 위해 자침, 살아남은 승조원들은 울릉도에서 주민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런데 러시아 병사들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고가의 청동주전자를 하나 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주전자 안에 막대한 양의 금화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
신일그룹이 지난달 17일 공개한 돈스코이호의 모습. 돈스코이호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장갑순양함으로 현재가치 150조원 상당의 200톤(t) 규모 금화를 싣고있던 보물선이라는 루머가 퍼지며 주식시장에 보물선 투기를 몰고오기도 했다.(사진=신일그룹 홈페이지)
신일그룹이 지난달 17일 공개한 돈스코이호의 모습. 돈스코이호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장갑순양함으로 현재가치 150조원 상당의 200톤(t) 규모 금화를 싣고있던 보물선이라는 루머가 퍼지며 주식시장에 보물선 투기를 몰고오기도 했다.(사진=신일그룹 홈페이지)


이후 보물선에 대한 신빙성 없는 믿음은 더욱 커지고 커져 오늘날에는 200톤(t) 규모의 막대한 금화를 싣고 있던 배였다는 이야기로까지 발전했다. 단순히 금화가 아닌 200톤짜리 금괴라고 해도 현재 가치로도 이 금의 가치는 우리 돈으로 9조원이 넘는다. 지난달 17일, 신일그룹이란 정체불명의 기업에서 이 돈스코이호를 울릉도 앞바다에서 발견했으며, 금화와 금괴 등 150조원 규모의 보물이 실려있다고 밝히면서 엄청난 화제가 됐다. 현재 해당 업체는 경찰이 사기혐의로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사실 배수량 6000톤 남짓에 길이 93미터, 폭 17미터짜리에 불과한 돈스코이호에 금괴 200톤을 싣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실제 금의 유무 관계를 모두 떠나 돈스코이호는 그런 보물선으로 불리기에는 너무나 기나긴 여정과 장렬한 싸움을 하고 산화한 전함이었다. 돈스코이호는 원래 1904년 10월15일, 발틱함대의 일원으로 발트해 리바우항에서 출항, 아프리카를 돌아 쓰시마 해협까지 이르는 3만킬로미터(km) 가까운 대 원정에 올랐던 배다. 1883년 진수돼 1885년 취역한 이후 제정러시아의 장갑순양함으로, 범선이 증기선으로 교체되는 시점에 취역해 돛대가 달려있던 과도기적 형태의 함선이었다. 전시가 아닐 때는 해군에서 교육용으로 많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발틱함대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 빨리 인도양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수에즈 운하의 수심이 얕아 거대한 함선들이 통과할 정도 수심이 못돼 하는 수없이 아프리카를 돌아야했다. 발틱함대가 아프리카를 돌아야하는 여정이 추가되면서 전세가 크게 밀려있던 일본은 시간을 벌게 된다.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뤼순함대와 블라디보스톡함대가 조우하지 못하게 양쪽을 막으면서 엄청난 희생 끝에 뤼순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고, 발틱함대가 동아시아 내로 들어왔을 때 상황은 러시아 해군에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돈스코이호 출항 당시 모습. 돈스코이호가 속했던 러시아 함대는 당시 운항 수심 한계로 인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를 돌아 2만9000킬로미터 이상을 항해, 동아시아 해안에 왔으며, 이로 인해 전투능력이 크게 저하돼 일본 연합함대에 참패하게 됐다.(사진=연합뉴스)
돈스코이호 출항 당시 모습. 돈스코이호가 속했던 러시아 함대는 당시 운항 수심 한계로 인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를 돌아 2만9000킬로미터 이상을 항해, 동아시아 해안에 왔으며, 이로 인해 전투능력이 크게 저하돼 일본 연합함대에 참패하게 됐다.(사진=연합뉴스)


이미 운항능력을 뛰어넘어 흑해에서 지중해로, 다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건너 동아시아까지 강행군을 한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톡에 입항해 전열을 재정비해야만했다. 문제는 일본 연합함대와 어떻게 하면 조우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톡까지 가느냐였다. 반대로 일본군은 어떻게하면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톡에 입항하기 전에 박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시 러시아군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3가지였다. 대한해협, 즉 대마도 앞바다를 통해 빠른 속도로 북상하는 것과 길을 크게 돌아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길을 돌아 홋카이도와 사할린섬 사이의 소야해협을 건너는 것이었다.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길은 가장 빠르면서 가장 위험했기 때문에 고민이 계속됐지만, 결국 발목을 잡은 것은 연료문제였다. 발틱함대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연료부족 문제가 심각했고, 이것이 결국 패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太郞) 제독은 이러한 발틱함대의 선택을 꿰뚫었다. 당시 일본 참모진들은 대부분 발틱함대가 너무 위험한 대한해협보다는 길을 돌아 소야해협으로 갈 것이라 예상했지만, 도고 제독은 확고하게 대한해협이 전장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주장이 관철되며 일본 함대는 진해 앞바다에 진을 치고 러시아 함대를 기다렸고, 그의 선택이 옳았음은 곧 증명된다.

일본 연합함대를 승리로 이끌었던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東鄕平太郞)의 모습. 당시 도고제독은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으로 올 것이라 확신했고, 그의 고집으로 대한해협 일대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다린 일본 함대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사진=위키피디아)
일본 연합함대를 승리로 이끌었던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東鄕平太郞)의 모습. 당시 도고제독은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으로 올 것이라 확신했고, 그의 고집으로 대한해협 일대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다린 일본 함대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사진=위키피디아)


러시아 함대는 일본군에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개가 짙게 낀 5월25일을 택해 속력을 늦추고 탐조등도 모두 끄고, 심지어 무전기까지 끊어버린 채 대한해협 통과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날 새벽 2시께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를 발견했고, 오후 2시가 되자 2열 종대로 진행 중이던 러시아 함대 앞에 가로 진형으로 늘어선 일본 연합함대가 나타났다. 일본 함대는 당황한 러시아 함대를 향해 일제히 집중 포화를 날렸으며, 전투의 승패는 여기서 결정됐다. 러시아 함대는 6시간 동안 일방적인 포격을 맞고 거의 괴멸됐다.

돈스코이함은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다. 11척의 순양함과 맞서 싸우면서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계속 북상하던 돈스코이함은 결국 울릉도 앞바다에서 자침됐다. 일본함대가 계속해서 항복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으며, 당시 함장이었던 레베데프 대령은 승조원들을 모두 하선시킨 후, 돈스코이호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고 한다. 결코 한가하게 보물수송이나 했던 배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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