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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목길]덕수궁 돌담길, '격동의 역사' 위에 '낭만'이 깔린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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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도 깊은 덕수궁 돌담장 길을
비를 맞고 말없이 거니는 사람
옛날에는 두사람 거닐던 길을
지금은 어이해서 혼자 거닐까
밤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에"
-가요 '덕수궁 돌담길' 中-

(일러스트= 아시아경제 오성수 화백)

(일러스트= 아시아경제 오성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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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가수 진송남이 1966년 발표한 노래인 '덕수궁 돌담길'에는 이 골목길과 얽힌 오래된 민담 하나가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두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거닐면 헤어진다는 서울의 도시전설이죠. 한번쯤 누구나 들어봤을 이 전설에 대해, 최근엔 수많은 커플들이 여기에 반발하듯 인스타그램에 "덕수궁 돌담길 손 붙잡고 걸었어도 1000일" 같은 게시글과 증명사진들을 올리곤 합니다.

물론 이 도시전설은 아무런 증거도 없는 낭설이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이런 도시전설이 생겨나게 된 이유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과거 이 돌담길 어딘가에 가정법원이 존재했고, 이혼을 준비하는 부부들이 꽤나 들락거렸다는 것이죠. 그 가정법원의 실체는 덕수궁 돌담을 바라보며 쭉 돌아가다보면 만날 수 있습니다. 돌담길 끄트머리 정동극장 앞 '삼미신(三美神)' 동상 분수대 앞에서 좌측 작은 샛길로 올라가면 만나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그 주인공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모습. 일제강점기인 1928년 경성재판소 건물로 지어졌다가 해방 이후 대법원 건물로 쓰였으며, 대법원이 현재 서초동 자리로 이전한 후 2002년 시립미술관으로 개관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모습. 일제강점기인 1928년 경성재판소 건물로 지어졌다가 해방 이후 대법원 건물로 쓰였으며, 대법원이 현재 서초동 자리로 이전한 후 2002년 시립미술관으로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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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과 가정법원이 대체 뭔 상관인가 하겠지만 이곳은 원래 미술관이 아니라 법원건물이었습니다. 1928년 일제강점기 경성재판소로 지어진 이 건물은 해방 이후 대법원 청사로 쓰였습니다.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 자리로 이전한 이후 전면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철거, 재건축에 들어가 2002년 5월부터 미술관으로 개관했죠. 일제강점기 재판소가 세워진 이래로 이혼을 준비하는 부부들이 많이 오고가면서 이런 전설이 생겼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덕수궁 돌담길일까요? 경복궁이나 다른 서울의 궁궐 근처에서는 이런 도시전설이 아예 없습니다. 커플들이 많이 오고가는 이유는 거리가 예쁘고 상당히 개방돼 있기 때문이고 실제 덕수궁 돌담길에는 다른 왕궁 돌담길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뿐만 아니라 정동교회, 정동극장, 과거 이화학당이던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러시아 대사관과 배재학당 자리였던 배재중ㆍ고등학교가 남아있고, 반대편으로 올라가다보면 영국대사관과 구 러시아공사관도 만날 수 있죠. 근대 교육시설들과 외교공관들이 왕궁 지척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왕궁에 가보신 분들을 아시겠지만, 왕궁 근처에 이렇게 왕궁 부속시설이 아닌 외교공관들이 위치해 있는 곳은 좀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진행되는 수문장 교체식 모습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진행되는 수문장 교체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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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덕수궁의 주인이었던, 조선 제 26대 임금이자 사실상 마지막 임금인 '고종(高宗)' 이란 인물의 인생역정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덕수궁은 원래 고종이 오기 전엔 왕궁으로 쓰인 역사가 없습니다. 이곳은 조선 제 9대왕인 성종(成宗)의 친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궁궐이 모두 불타자 전후 한양에 돌아온 선조(宣祖) 임금이 겨우 외형이 남은 이 집을 임시행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때 붙여진 이름이 '정릉행궁'이었죠. 어디까지나 임시거처여서 선조의 아들 광해군 때 창덕궁이 복구된 이후로는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만 하사받은채 그대로 방치됐었습니다.

이후 수백년이 지난 1897년, 고종이 이곳을 정궁으로 삼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자 황궁이 됩니다.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자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1년간 머문 후 러시아 공사관과 담이 맞닿아있는 이 경운궁으로 돌아옵니다. 일본이 또 왕궁을 범하면 바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서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죠.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 실제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전까지 일제와 친일파의 세력은 상당히 위축되게 됩니다.

옛 러시아 공사관 터에 남은 감시탑 모습. 6.25 전쟁으로 감시탑 외에 다른 공사관 건물들은 파괴됐다. 군사기지와 같은 모습의 공사관은 러시아군이 주둔했던 병영, 연병장과도 연결돼있었다고 한다.

옛 러시아 공사관 터에 남은 감시탑 모습. 6.25 전쟁으로 감시탑 외에 다른 공사관 건물들은 파괴됐다. 군사기지와 같은 모습의 공사관은 러시아군이 주둔했던 병영, 연병장과도 연결돼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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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감시탑 하나만 남아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 터를 찾아가보면 공사관이라기보다는 군사기지처럼 세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이 소실됐지만, 높은 구릉지대에 위치해 주변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높은 감시탑까지 설치한데다 과거에는 병영과 연병장도 갖추고 있었다는군요. 공사관과 연병장은 지하통로로 연결돼있었다고 하니 아주 단단한 요새였던 셈이죠.

각국의 공사관들이 두루 포진해있던 경운궁 일대는 구한말 풍전등화의 국운을 걸고 고종의 외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골목이기도 한 셈입니다. 고종은 이 외교전의 복판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근대화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급한 마음과 달리, 국운이 이미 크게 기운 상태에서 그의 개혁은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죠.

덕수궁에 남아있는 근대 서양식 궁궐인 석조전(石造殿)을 바라보면 당시 광무개혁의 답답함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저런 외관에 신경쓸 비용을 군비로 썼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에 대한 아쉬움들이 생겨나죠. 석조전 바로 옆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서있는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의 모습 또한 답답합니다. 근대와 전근대가 혼란스럽게 섞인 광무개혁의 슬로건, '구본신참(舊本新參)'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덕수궁 석조전 모습

덕수궁 석조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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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화전 모습

덕수궁 중화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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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저 어색한 중화전은 1904년 화재에 휩싸여 전소됐다가 복구된 건물로 예산 부족으로 원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단층 건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위엄이 전혀 느껴지질 않죠. 중화전 앞뜰에 위치한 품계석들도 왠지 힘이 없어보입니다. 중화전 뒤에 위치한 즉조당(卽祚堂)과 석어당(昔御堂)도 그때 복구된 건물로 특히 석어당은 단청조차 돼있지 않은 민가같은 모습으로 서있습니다.

이 힘없는 경운궁에서 조선의 망국 또한 결정됩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사실상 조선왕조의 멸망을 고한 을사늑약도 경운궁에서 체결됐고, 이후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임되고 군사해산이 결정된 곳도 이 궁궐이었죠. 고종이 강제 퇴위돼 상황이 되면서 이곳의 이름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게 됩니다. 원래 덕수궁은 어떤 궁궐의 이름이 아니라 국왕이 바뀐 이후 생존한 상왕의 거처를 이르는 일반명사였기 때문이죠.

덕수궁 중화전 앞에 위치한 품계석 모습

덕수궁 중화전 앞에 위치한 품계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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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종이 1919년 승하하자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 더욱 빠른 속도로 역사에서 지워지기 시작합니다. 덕수궁 돌담길이 민간에 개방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1921년 이곳에 길을 낸 일제는 덕수궁 돌담길 일대를 연인들의 거리처럼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물원으로 격하된 창경궁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치욕을 고스란히 안게 됐죠. 이후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광화문 앞에 지어지고 지금은 서울도서관이 된 경성부청 신청사 건물도 같은 해에 완성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경성재판소 건물도 지어지면서 1920년대 일제 주요 관청들의 거리가 완성됐죠.

우리에게는 치욕스런 역사의 건물들이지만 한편으로 1, 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戰間期)인 1920년대 건물은 전 세계적으로 원형을 유지한 건물이 드문 편이라 건물 자체가 유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때 건물들은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한국전쟁 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모두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지어진 건물들로 당시 일본 조야에서 제기됐던 '경성천도'를 감안해 지었기 때문으로 알려져있죠. 정말 당시 일제가 수도를 서울로 옮겼다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참으로 섬뜩한 상상이 일어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대사관이 지난해 8월 개방한 덕수궁 돌담길 100미터(m) 구간 모습

영국대사관이 지난해 8월 개방한 덕수궁 돌담길 100미터(m) 구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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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거를 뒤로 하고 현재의 덕수궁 돌담길은 문화재 복원의 최전선에 위치한 곳입니다. 2010년부터 시작된 덕수궁 복원사업에 따라 일제강점기 철거된 많은 전각들이 복원될 계획입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던 지난 2015년, 문화재청이 2039년까지 사라진 덕수궁의 선원전(璿源殿) 일대를 복원한다고 발표했죠. 지난해 8월에는 주한 영국대사관이 보안의 이유로 점거했던 덕수궁 돌담길 170m 구간 중 100m 구간을 개방하면서 보행길이 더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연인과 이별 등 낭만의 장소로 불리던 덕수궁 돌담길이 앞으로는 한국 근대사와 외교의 길로,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역사적이고 의미있는 장소로 소개될 날을 바래봅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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